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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홍길동전' 저자 허균의 경제관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7.18 17:19

수정 2016.07.18 17:19

[fn논단] '홍길동전' 저자 허균의 경제관

고고한 조선 선비들은 먹고사는 경제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소설 '홍길동전' 의 저자 허균(許筠)은 은퇴 후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고 싶어 '한정록(閑情錄)'을 썼다. 이 책은 기구한 운명 속에 태어났다. 허균은 그동안 몇 차례 탄핵으로 관직이 박탈되지만 뛰어난 재능 덕분에 복직을 거듭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위직에 올라 인목대비 폐비론에 앞장서게 되자, 정적들이 생겨났고 급기야는 반역죄로 몰리게 된 것이다. 다행히 무혐의로 풀려나자 그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 책을 마무리했다.

허균은 성리학이 조선을 지배하던 시대, 이단아였다. 1569년 유교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난 그는 대과급제를 통해 관직에 등용되지만, 신분제도에 반기를 들어 서얼의 인재 등용을 주장하고 남녀 애정에도 거침없는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그의 자유분방한 사고는 성리학에 머물지 않고 불교, 도교를 자유롭게 넘나들었고 심지어 중국 사행을 통해 서양 천주교의 지식마저 접하게 되었다.

'한정록'은 산림에 은둔하며 신선처럼 살겠다는 다분히 현실도피적인 내용을 담은 책이다. 그런데 이 책 마지막 16권지에는 특이하게도 먹고사는 방법을 논한 '치농(治農)'편이 들어 있다. 그가 경제 문제를 농업 중심으로 쓴 것은 당시 사농공상(士農工商) 생업 중에서 농업이 근본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선처럼 살려 해도 먹고사는 경제 문제가 선결돼야 한다. 게다가 당시는 노비들을 포함한 많은 식솔들을 거느린 대가족제였다. 그는 치농편에서 농사에도 종복들에게 토지와 일을 효율적으로 분담시키는 경영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곡식을 심고 채소를 가꾸고 모시와 면화로 의복을 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수확 철이 아닌 때나 불의의 재해를 대비한다면 항시 현금으로 교환할 수 있는 상품화가 용이한 품목으로 치부책도 마련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허균의 치농편에는 '자본'이란 제목의 단락이 있다. 여기서 그는 "모든 경영이 자본이 없으면 바로 설 수 없고 재물이 아니면 이룰 수 없다"고 하면서 "꼭 부(富)까지 이룰 필요는 없지만 자본은 없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는 자본 증식의 수단으로 목재와 과수를 얻을 수 있는 나무를 심고, 부를 위해서는 다섯 가지 가축이나 물고기를 기를 것을 권했다. 자급자족을 위한 영농을 하더라도 과실, 가축, 계란, 물고기, 완두 등 상품화될 수 있는 품목을 길러야 어려울 때 필요한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허균은 자신의 생각을 실행해 보지 못했다. 이듬해 다시 반역죄로 몰리게 되자 이번에는 벗어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서둘러 자신의 문집과 장서들을 사위 집에 비밀리에 옮겨놓으며 외손자에게 후일 이를 편찬해줄 것을 당부했다. 결국 그는 가장 참혹한 능지처참형으로 생을 마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세월이 흐른 뒤,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시절 희생된 대부분의 선비들이 사면복권되지만, 허균만은 조선이 패망하던 날까지 끝내 반역죄인으로 남았다.
다행히 외손자에게 전해진 자료들이 살아남아 그의 사상과 학문을 재평가받게 된다.

허균이 죽은 지 약 100년 뒤, 홍만선이란 선비가 '한정록'을 읽고 감명을 받아 내용 중 한 문구를 따와 '산림경제'란 책을 썼다.
여기서 먹고사는 문제를 다룬 우리나라 특유의 생활경제학이 생겨나게 된다.

이호철 한국IR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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