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주영 칼럼]

대우조선 재판을 미국서 한다면

지령 5000호 이벤트

회계부정 엔론 사태 판박이.. 회사는 파산, 경영진은 24년형
시장 속이면 살아남지 못해

분식회계가 탄로나면서 주가가 하루아침에 80달러에서 1달러로 곤두박질한다. 회사는 곧 파산한다. 최고경영자(CEO)는 1심에서 증권사기죄로 24년형을 선고받는다. 회장도 24년4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재판이 끝나기 전에 사망한다. 미리 주식을 처분하고 회사를 떠났던 부회장은 재판 직전 자살한다.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죄를 자백하고 수사에 협조한 대가로 10년형을 선고받는다. 분식회계로 부풀려진 실적에 근거해 지급된 성과급은 전액 몰수된다. 회사를 감사했던 회계법인은 해체된다. 거액의 자문료를 받고 분식회계에 자문을 제공한 투자은행들은 투자자에 대한 손해배상과 벌금 등으로 80억달러를 물어준다.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15년 전 분식회계로 파산한 미국의 에너지 기업 엔론의 이야기다. 엔론은 당시 매출액이 1010억달러에 종업원 수 2만2000명으로 미국 7대 기업에 속했다. 포천지가 6년 연속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선정했을 만큼 명망이 높은 기업이었다. 그런데 2001년 말 정보기술(IT) 산업의 버블 붕괴와 함께 이 회사에서 대규모 분식회계가 발각됐다. 기업 인수합병을 통해 미래의 예상이익을 실현된 이익인 것처럼 장부에 반영했다. 손실이 나면 유령 자회사를 만들어 떠넘겼다. 이런 식으로 자산을 실제 가치보다 30~40% 부풀렸으며 100억달러 규모의 손실을 감췄다.

미국의 시장과 사법당국이 분식회계를 저지른 기업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눈여겨봐야 한다. 엔론 사건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우리도 이 사건을 그대로 빼닮은 대우조선해양의 처리를 눈앞에 두고 있어서다. 대우조선은 비용을 실제보다 줄이고 이익을 부풀리는 수법으로 지난 수년간 5조원대의 분식회계를 한 사실이 검찰 수사에서 드러났다. 전임 고재호 사장 시절에 저질러진 일이다. 어제(18일) 남상태 전 사장이 기소된 데 이어 조만간 고 전 사장도 재판에 넘겨질 예정이다. 이와 별도로 피해 배상을 요구하는 소액주주들의 소송도 잇따르고 있다. 최근에는 국민연금도 여기에 가세했다. 우리 사법부는 어떤 판결을 내릴까.

미국에서는 기업이 분식회계를 하다 들통이 나면 한마디로 뼈도 못 추린다. 회계부정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 공표되는 재무제표를 믿고 투자한 수많은 선의의 투자자에게 막대한 손실을 떠안기는 범죄행위다. 이것이 되풀이되면 시장이 성립할 수 없다. 회계부정은 시장을 무너뜨리는 암적 존재로 간주된다. 자본시장에 대한 신뢰를 훼손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까지도 큰 사고만 나지 않으면 조금씩 분식회계를 하는 정도는 관행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다. 특히 사법부의 인식이 안이하다. 분식회계에 대한 처벌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집행유예 정도가 고작이다. 아예 형사처벌이 면제되는 경우도 많다. 개인의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단순 경제범죄는 엄히 처벌하면서 다수의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시장파괴형 범죄를 관대하게 처벌하는 것은 모순이다. 사법부가 분식회계 기업들에 관용을 베풀어 재기의 기회를 주는 것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시장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분식회계 기업을 살려두면 시장이 죽는다. 분식회계를 묵인한 회계법인들도 마찬가지다.

자본시장이 발달한 선진국에서는 시장을 속인 기업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 대원칙이다.
미국이 오늘날 세계 최고의 시장경제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원칙이 살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21세기 들어 소득 양극화와 월가 일부 자본가들의 탐욕 등으로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미국식 자본주의에는 그것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정직과 공정의 가치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점도 그중 하나다.

y1983010@fnnews.com 염주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