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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 '삼례 3인조' 재심의 의미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7.26 17:27

수정 2016.07.27 10:42

[여의나루] '삼례 3인조' 재심의 의미

유죄 확정판결에 대해 재판을 다시 새로 하는 재심이 개시되려면 무죄를 인정할 증거의 '신규성'과 '명백성' 이 인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 이 두 장벽을 뛰어넘기는 너무 힘들다. 재심을 '열리지 않는 문'이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달 8일 전주지법은 지난 1999년 완주군 삼례읍에서 슈퍼마켓 주인 할머니를 숨지게 했다 하여 징역 3년에서 6년 형을 복역한 이른바 '삼례 3인조' 강도치사사건에 대한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재판부는 '올해 초 진범이라는 사람이 양심선언을 한 데다, 피해자 사위가 촬영한 경찰 현장검증 영상 등을 보면 무죄를 인정할 만한 새롭고 명백한 증거가 있다'고 보았다. 이 영상에는'삼례 3인조'를 지칭해서 "야는 탤런트고, 쟈들은 신인이구먼"이란 경찰의 말과 함께 두려워하고 당황해하는 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이들이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직후 그해 11월 부산지검에서 '부산 3인조'를 체포해 이 사건 범행에 대한 자백을 받아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인계받은 전주지검에서는 이들을 무혐의 처분했다. 당시 진범이라고 고백한 이모씨는 "수사관이 '네가 범행은 했어도 범행장소가 다른 곳일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자신의 말을 묵살했다"고 한다.

복역 당시 청년이었던 '삼례 3인조'의 최씨는 지난 10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17년 세월은 돌아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고 고백하면서, 나를 폭행한 형사들에게 나와 똑같은 고통의 세월을 살게 해주고 싶다는 취지의 말로 그 분노를 표출했다.

국가권력의 오만과 남용으로 진실과 정의가 희생당한 대표적 사건으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실화 영화의 바탕이 된 영국의'길퍼드 4인방(Guildford Four)' 사건과 작가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공개편지로 국수주의자와 지식인 간에 사상전쟁을 치렀던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을 들 수 있다.

1974년 길퍼드의 한 식당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했는데, 실화의 주인공 제리 콘론 등이 경찰의 고문, 심지어 가족에 대한 노골적인 협박으로 이 범행에 대해 거짓자백을 해서 살인 등의 죄로 15년을 복역한 뒤 1989년에야 재심으로 풀려났다. 그 과정에서 1977년 진범이 경찰에다 길퍼드 4인방은 혐의가 없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이를 묵살했다. 2005년 토니 블레어 총리는 이 최대의 사법 과오에 대해 사과까지 했다.

인간은 허약한 존재라 허위자백할 개연성이 있고, 법관은 이러한 자백에 너무 큰 비중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가슴 깊이 새기게 한 사건이다. 재심재판부가 지적한 대로라면 '삼례 3인조'의 자백진술은 그 범행의 방법, 내용 등이 일관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간에 모순되거나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은데, 유죄를 선고한 재판부는 이 부분 의심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해소했을까.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군대의 횡포와 음모 거기다 끝까지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뻔뻔함과 가증스러움이 더해져 있다. 1894년 유대계 장교 드레퓌스가 조작된 증거에 터잡아 군사기밀을 빼돌렸다는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아프리카 '악마의 섬'에 유배되었는데, 1898년 진범 에스테라지가 잡혀 재판에 넘겨졌지만, 어이없게 그에게 무죄가 내려진다. 이에 에밀 졸라가 용감하게 군대의 오만과 편견을 고발했고, 여기에 가세한 지식인들의 요구로 1899년 두 번째 재심이 열렸으나, 그 법정에서도 드레퓌스는 역시 유죄가 되었다.


사형 판결이 집행되면 그 뒤 재심판결로 종전 판결이 무효화돼도 죽은 목숨이 살아 돌아올 리 없다. 죄 없는 자에 대한 유죄판결은 정의감정을 엄청나게 해친다.
'의심스러울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사재판의 철칙은 법정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여야 한다.

이주흥 법무법인 화우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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