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학에 듣는다]

유로존 규율의 조용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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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오루크 영국 옥스퍼드대 경제사 교수

때때로 아무 반응이 없는 게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셜록 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밤에 짖지 않는 개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성장과 안정 협약(SGP)과 관련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구속력 있는 대응에 나서지 않은 게 이 가운데 하나다.

SGP 규정에 따르면 집행위는 재정적자 한도를 크게 초과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벌금을 물리도록 제안해야만 했다.

짖지 않기로 결정한 건 집행위만이 아니다. 나머지 유럽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심지어 EU의 규제를 주도하는 독일조차 선한 역할을 하기로 작정한 것 같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이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 벌금을 물리지 말라고 여러 집행위원들에게 청탁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독일 경제신문들은 종종 집행위가 너무 느슨하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이 결정은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침묵이 뜻하는 것은 뭘까.

전례가 없지는 않다. 2003년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3대 경제국(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모두 국내총생산(GDP)의 3%로 돼 있는 재정적자 한도를 초과했다.

집행위는 그러나 지금과는 달리 짖었다(물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벌금은 없었다. EU 재무장관들은 주로 정략적인 이유로 이마저도 거부했다.

갈등은 유럽 전 지역 신문들의 1면을 장식했고, 특히 언론이 야당 역할을 하는 독일에서는 엄정한 재정규약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며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부를 비판하는 데 열심이었다. 재정규약과 이를 강제하는 집행위의 역할에 대한 논쟁이 달아올랐다. 다시 말해 모두가 짖고 있었다.

저항에도 불구하고 집행위는 밀어붙이기로 결정했고, 독일과 프랑스를 제재했다. 이 결정으로 집행위는 진지한 자세로 EU 조약들을 집행하고 있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냈다. SGP의 경직성을 강하게 비판했던 로마노 프로디 당시 집행위원장도 규약을 집행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에는 정치적 이해가 최종적인 승자가 됐다. EU 재무장관들은 제안을 기각했다. 장관들은 SGP 개혁에 착수했다. 초점을 총재정적자에서 각국의 경제상황을 고려해 재정상태를 측정하는 것으로 바꿨다.

현재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개정된 이 느슨한 규정조차 지키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장클로드 융커 위원장이 이끄는 현 집행위는 규정을 강제해야 하는지를 놓고 분열돼 있다. 일부 위원들은 관용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 집행위는 근래 재무장관들의 저항을 제압할 힘을 갖고 있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유럽은 '역다수결 규정'을 도입했다. 이 규정에서는 EU 재무장관들의 3분의 2 이상이 반대하지 않는 한 집행위의 벌금 제안이 최종결정된다. 그리고 여기에 중대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SGP 규정을 집행하겠다는 집행위의 의지가 2003년에 비해 퇴보한 것이다.

대중과 언론의 침묵은 문제를 원점으로 돌려놓고 있다. 재정규약에 대한 지지는 퇴색했다. 아마도 특히 독일과 프랑스에서의 테러 공격 급증이 시민과 지도부를 안보 이슈에 압도되도록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 역시 관심을 분산시키고 있다.

그러나 유럽 재정규약에 대한 지지 퇴색은 심각한 위험을 초래한다. 유로존 규율 구조의 가장 단단한 요소가 엄격히 적용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회원국에 재정적자와 관련한 개혁과 안정을 강제할 수 있단 말인가. 모호한 권고는 먹히지 않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집행위는 여전히 '참된' 경제통화공동체(EMU)를 위한 청사진 실현을 위해 일하고 있다. 그러나 SGP를 강제하지 않기로 결정함으로써 이 같은 노력은 무의미해졌다. 이제 EU 회원국들은 공동규정, 그리고 유럽의 공동선보다 국내의 정치적 책무를 우선시한다는 것이 어느 때보다 자명해졌다.

정리=dympna@fnnews.com 송경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