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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 샤일록 재판 유감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10.25 17:18

수정 2016.10.25 17:26

[여의나루] 샤일록 재판 유감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이른바 인육(人肉) 재판은 유명한 이야기다. 잘 알다시피 빌려간 돈을 제때 갚지 못했다고 하여 유대인 샤일록이 증서에 쓰인 대로 베니스 상인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요구하자 재판관 포셔는 "계약이 살 1파운드만 허용하고 있으므로 1파운드를 더해도 덜해도 안되고, 아울러 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법에 따라 전 재산을 몰수한다"고 경고하고는, 종국에 이방인이 베니스 시민의 생명을 노렸다 하여 샤일록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조건으로 샤일록의 목숨을 살려준다는 내용이다.

이 희곡에서는 당시 런던 시민의 반유대 정서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안토니오가 리얄토 다리 근처에서 샤일록을 '사람 죽일 개'라고 하면서 면상에다 침을 뱉고 발길질하곤 했을 만큼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는 전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었다.

독일의 법학자 예링은 샤일록이 법을 곡해하면서 계약문언대로 법 적용을 요구함으로써 부정을 행하고 있음에 격분을 느꼈다고 한다. 독일의 법철학자 라드부르흐 역시 샤일록의 계약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가치 없는 종류의 인간, 더구나 유대인의 생각이 깊지 못한 거래'라고 했다.
서구에서는 대체로 재판관 포셔를 솔로몬에 비유할 만큼 그 혜안과 통찰력을 높이 산다. 샤일록과 포셔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과연 보편적일까.

우선 포셔는 약혼자 밧사니오의 친구인 안토니오의 재판을 주재하기 위해 남자 옷으로 변장하고 변성기 소년의 목소리를 내어 남성 법학자인 양 법정 단 위에 앉은 공작과 샤일록을 속였다. 또 소송당사자인 안토니오의 친구이자 돈을 빌린 밧사니오의 약혼녀이기 때문에 이 재판을 맡아서는 안된다. 계약해석에 있어서도 증서상 '살 1파운드'로 되어 있다면 채권자인 샤일록이 정확하게 살 1파운드 전부를 다 떼내야 하고, 살 1파운드 아래를 떼내서는 안된다는 의무는 성립되기 어렵다. 담보물 1파운드 미만으로의 하향 조정은 자기 권리의 일부 포기다. 또 자연의 법칙상 살을 떼내는데, 어떻게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피를 흘리지 않겠다는 약정 역시 계약서에 규율된 바 없다.

샤일록이 빌려준 돈만 받겠다고 한 발 물러서는 데도 포셔가 이를 거절한다는 것은 월권적 처사다. 더욱이 그 상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샤일록이 살인을 획책했다 하여 전 재산 몰수와 특별사면 조건으로 강제 개종을 명하는 가혹한 징벌이 과연 정의일까. 위약벌로서의 '살' 넘겨받음을 포기하고 원래대로의 차용금 청구를 하거나 아예 그 청구마저도 포기한다면 포셔는 그 선에서 이 사건을 종결했어야 했다.
심지어 샤일록의 목숨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개종을 명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의 침해다.

십자군전쟁과 흑사병 창궐 후 일상화된, 유대인에 대한 약탈과 추방 그리고 학살 속에서 사랑과 자비를 외쳐대는 크리스천의 오만과 위선, 이중성에 유대인은 얼마나 치를 떨었을까. 치욕의 징표인 노란색 모자와 가슴 위에 노란 천 마크를 착용해야 하고, 격리된 게토(ghetto)에서만 거주해야 하는 유대인으로서는 크리스천도 피를 흘려 봄으로써 자기 소유물로 여기는 노예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유대인이 같은 인간임을, 또 수모를 당하면 누구나 앙갚음하려는 것이 인지상정임을 깨닫게 하려고 하지 않을까.

비서구인의 관점에서 포셔의 재판을 음미해 보면서 최근 미국 대통령 후보 트럼프의 비기독교 세력, 특히 무슬림과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비하 발언이 떠오른다.
지구상에서는 또 다른 '샤일록'이 외면과 곡해, 매도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마음이 든다.

이주흥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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