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순의 느린 걸음]

피해자와 공범의 차이

한 폭력조직이 전통시장 상인들에게 '보호비'라며 수년간 돈을 뜯어갔다. 보호비의 명분은 상인들이 걱정 없이 안전하게 장사할 수 있도록 폭력조직이 보호해준다는 것이다. 상인들은 빠듯한 살림에 보호비를 내는 것이 억울했지만, 폭력조직이 두려워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보호비'의 진실은 상인들이 폭력조직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자구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폭력조직이 경찰에 잡혔다. 과거 저질렀던 수많은 범죄와 폭력행위가 드러나고, 폭력조직 활동의 근거가 된 자금은 상인들 주머니에서 나온 보호비였다는 것도 밝혀졌다. 그렇다면 상인들은 폭력조직에 자금을 대준 공범일까, 폭력조직의 주먹 앞에서 스스로 보호해야 했던 피해자일까.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의 수사 과정을 보면서 조폭의 보호비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최순실 일당의 자금줄이 되는 재단 자금을 모으려 기업들에 공공연히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문화.스포츠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자금이라는 게 명분이었다. 재단뿐 아니라 최순실의 개인적 인맥을 위해서도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반강제로 돈을 뜯어간 것도 모자라 기부를 꺼리는 기업에는 대포폰까지 써가며 "○○○ 잘리는 것 안 봤느냐"고 협박전화도 했단다. 최씨 일당이 벌인 일을 보면 시장통 조폭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 기업들은 돈을 냈다. 재단에도 기부하고, 최씨 일당의 개인적 자금인 것을 알면서도 돈을 보내줬다.

기업들은 그 돈이 진정 대한민국의 문화.스포츠 발전에 기여하는 데 쓰이는 돈이라고 판단해서 돈을 냈을까. 청와대를 들먹거리는 최순실 일당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보호비'는 아니었을까.

두 가지 상황은 딱 비슷한데, 검찰 수사 과정은 뭔가 다르고 이상하다. 조폭이 부당하게 돈을 요구하면 경찰에 신고하는 게 마땅한데, 왜 돈을 줘서 폭력배들이 활개를 치도록 만들었느냐고 상인들에게 따지는 모습이다. 돈을 주면서 회계장부에 정당하게 적어넣지 않고 몰래 줬으니 법을 어겼다고 으름장도 놓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법을 지키지 않은 흔적이 보인다. 그런데 현실에 적용하면 틀린 말이 된다.
대통령을 들먹이며 수석비서관이 나서서 돈을 요구하는데 영수증 내놓으라 할 수 있는 기업이 있겠는가. 회계장부에 적을 수 있는 돈 아니면 절대 낼 수 없다고 버틸 수 있는 대한민국 기업이 있겠는가.

내용이 어떻든 법을 어긴 것에 대해서는 응당한 벌을 받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돈을 줬다는 결과가 동일하더라도, 폭력조직 자금줄인 공범과 삥 뜯긴 피해자의 차이는 선을 긋고 수사를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또 근본적으로 폭력조직을 한번 소탕한 뒤 다른 조폭이 또 나타나 상인들을 괴롭히지 않도록 경찰이 보호해준다는 확신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한 조폭 소탕했더니 1년 뒤 다른 조폭이 나타나 '보호비'를 요구할 게 뻔하다면 상인들은 미리미리 '보호비'를 챙겨두지 않겠는가.

cafe9@fnnews.com 이구순 정보미디어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