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영 칼럼]

바뀌어야 할 것은 '정치 문화'다

"한국은 장례식.결혼식 등 완화된 뇌물문화가 발달"
법치 무시하면 5년 뒤 또 촛불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연설을 듣다 조금 놀랐던 기억이 난다. 국정과제로 '문화융성'을 제시했을 때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다. 문화.예술이란 소프트파워의 확보는 국민소득 3만달러 못잖은 선진국의 대전제가 아닌가. 다만 기자로서 대통령이 되기 전 그를 몇 번 만났지만 문화 콘텐츠가 풍부해 보이진 않았기에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문화융성이 박 대통령을 탄핵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당시엔 비선실세의 존재를 알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순실이 배후에서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과 운영에 관여한 사실이 드러날 때까지 말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박근혜정부에서 '시위문화'만큼은 한 차원 융성시킨 느낌이다. 7차례 촛불시위가 돌멩이도, 물대포도 없이 평화롭게 끝났으니….

'메세나'. 문화.예술에 대한 기업의 지원활동을 가리키는 용어다.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로마제국의 정치가 마에케나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꽃피운 메디치 가문은 메세나의 정수를 보여줬다. 이 가문의 뛰어난 인물들이 으스대지도,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예술을 후원하면서다.

메세나를 이식하기엔 이 땅은 아직 척박했던 모양이다. 아니, 재벌의 팔을 비틀다시피 해 챙긴 목돈으로 미르.K스포츠재단을 만들려 했으니 첫 단추부터 잘못 채운 셈이다. 더욱이 최순실.고영태 같은 문화적 격조와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 끼어들었으니 사달이 나지 않으면 외려 이상했다. 오죽하면 영국 BBC방송이 고영태의 폭로가 부른 이번 사태를 '강아지 게이트'라고 조롱했겠나. 고영태가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강아지를 돌보지 않고 골프장으로 가면서 생긴 다툼은 실화지만, 국민의 눈엔 예술성이라곤 한 올도 없는, '웃기지만 슬픈' 드라마였다.

물론 박 대통령은 문화진흥의 선의를 강조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정 사유화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순 없어 보인다. 유능한 인재를 발탁해 소통해가며 문화행정을 펼치진 못할망정 그 빈자리를 '강남 아줌마'가 분탕질하도록 방조했으니….

좌절된 '소프트파워 강국'의 꿈이 다음 정권에선 이뤄질 것인가. 탄핵 이후 정치권의 구태를 보면 싹수가 노래 보인다. 작금의 난국에 크고 작은 책임을 져야 할 새누리당 내 친박과 비박 간 내홍을 보라. "네가 가라, 하와이"라는 영화대사처럼 상대의 탈당만을 바라고 있다. 반성은 없고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한 꼴이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국가 대청소론'에서도 불길한 그림자가 어른댄다. 이 와중에 시민단체로 사회개혁기구를 꾸려 '초법적' 비상대권을 행사하겠다고? 현 정부가 탈법적 방식으로 문화융성을 하려다 실패한 데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얘기다.

한국의 탄핵상황을 분석한 11일자 뉴욕타임스를 읽고 무릎을 쳤다. "재벌뿐만 아니라 장례식과 결혼식 등 완화된 형태의 '뇌물문화'가 발달한 곳이라 '사회 전반'의 인식전환이 필요하다"는 대목에서다.
그렇다. 정작 시급히 바뀌어야 할 건 우리의 '정치문화'다. 대권을 잡으려고 법치주의를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고 '제왕적 대통령' 앞에 줄서기에 급급한 풍토가 개선되지 않으면 5년 후 다시 광화문이 촛불로 뒤덮이지 말라는 법도 없을 듯싶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