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 칼럼] ‘광장의 정치’와 ‘제도의 정치’

조석장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12.15 17:41

수정 2016.12.16 10:47

[데스크 칼럼] ‘광장의 정치’와 ‘제도의 정치’

최순실 게이트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가 가결됐다.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결이 남아있긴 하지만 '임기중단 대통령'이란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질 운명에 처했다. 외국언론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을 조롱했지만, 한국 국민들의 평화로운 저항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한 촛불시위는 지난 12월 17일 7차 집회까지 연인원 750여만명(주최측 추산)이라는 엄청난 국민들이 참여했지만, 부상자 한명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롭게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국민들은 주권자로서의 정치적 파워를 발휘할 수 있다는 정치적 효능감을 맛보았다.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월드컵 뷹은악마 응원에서 시작된 참여열기를 바탕으로 촛불시위는 굴곡진 정치사마다 등장하며 한국정치의 상수(常數)가 됐다.


그런데 대통령탄핵 무대가 국회에서 헌법재판소로 옮겨지면서 촛불시위가 새로운 논쟁의 씨앗으로 다시 부활하고 있다 . 촛불시위가 탄핵심리를 겁박해서는 안되며, 국회에서 탄핵결정이 난 만큼 이제 모든 결정을 헌재에 맡기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냐는 논란이다.

소위 광장의 정치와 제도의 정치의 문제다. 이 논쟁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서구의 많은 민주주의 연구자들의 오랜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직접민주주의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의민주주의는 유권자인 국민이 대표를 뽑아 국민을 대신해 국가의사ㆍ정책 등을 결정하게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게 하는 정치시스템으로, 그 근간은 정당과 의회다. 따라서 대의제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들의 삶의 조건을 반영하는 이익과 요구는 정당을 중심으로 한 결사체들을 통해 정치과정에 투입돼야 마땅하다.

정당민주주의론자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때 "촛불시위는 민주주의 제도가 무기력하게 작동하지 않고 정당이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허약할 때 정치적 구원투수 같은 역할을 했지만, 민주주의에서 운동의 역할을 과도하게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거리의 정치가 본질적으로는 제도의 정치, 의회정치로 수렴돼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많은 선진국에서 대의민주주의의 가치와 필요성을 존중하되 대의자들이 유권자의 뜻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참여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요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사상가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프랑스의 낙후된 정치상황에 고민하던 중 미국을 방문했다가 미국 민주주의에 큰 충격을 받고 그 핵심이 무엇이지를 파악하려했다. 토크빌은 민주주의 역사에서는 선거를 통해 민주적 국가권력이 성립된 이후에도 종종 국민들을 억합하고 권력을 사유화하는 '민주적 전제주의'의 사례가 발생하는데, 미국은 이같은 위험을 막기위해 평상시에도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의 감시와 영향력을 유지시켜왔다는 점을 발견했다. 시민사회의 감시와 참여가 미국 다원민주주의의 힘이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때에도 광장의 민주주의가 때로는 제도권 민주주의보다 더 높은 공적인 '성찰능력'을 지니고 있을때가 많았다는 점에서 거리의 정치를 단순히 하위정치로 폄하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나 촛불의 그늘에 자리잡고 있는 포풀리즘의 유혹도 역시 잘 살펴야한다.
촛불의 분노를 슬기롭게 창조의 에너지로 어떻게 승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한국 정치의 또다른 숙제다.seokjang@fnnews.com 조석장 정치경제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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