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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트럼프와 ‘미치광이 이론’

서혜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12.23 17:56

수정 2016.12.23 20:55

서혜진  로스앤젤레스 특파원
[월드리포트] 트럼프와 ‘미치광이 이론’

1972년 4월 19일 오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말했다. "헨리, 우린 이번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네. 난 그 망할 국가(북베트남)를 파괴할 거라네. 필요하다면 파괴할 거라는 의미지. 그리고 필요하다면 핵무기까지 사용할 걸세. 그러나 내가 의미하는 것은 내가 어느 정도까지 갈 의지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네." 키신저가 월남전과 핵군축 문제 등을 논의하는 비밀회동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출발하기 몇 시간 전이었다. 키신저는 닉슨 대통령의 말에 동의하며 "우리가 더 무모하게 보일수록 더 좋습니다. 왜냐면 결국 우리가 그들에게 확신시키려 하는 것은 우리가 갈 데까지 갈 거란 거죠"라고 답했다.

닉슨은 나중에 백악관 비서실장 H R 홀드먼에게 "종전을 위해 어떤 일도 할 수 있다고 믿도록 하겠다"며 이를 '미치광이 이론'이라고 불렀다. 상대에게 미치광이처럼 보임으로써 공포를 유발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끈다는 것이다.
닉슨은 월남전 기간에 의도적으로 자신을 미치광이로 포장했다. 소련과 북베트남을 겨냥해 공산당에 강박증이 있고, 화를 주체 못하며, 핵단추를 언제든 누를 수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충동적이고 비이성적 인물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인식시킴으로써 소련 등이 감히 덤비지 못하게 하려 했다.

'미치광이' 콘셉트는 1950년대 핵불안 속에서 나온 게임이론의 산물이었다. 키신저도 백악관에 입성하기 10년 전 하버드대 국제관계학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이 콘셉트를 자신의 저서를 통해 지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게임이론은 1944년 폰 노이만과 모르겐슈테른의 공저 '게임이론과 경제행동'에서 이론적 기초가 마련됐으며 불확실성과 갈등 상황의 행동을 분석한다. 게임이론에서 경쟁 주체는 상충적이고 경쟁적 상황에서 상대방의 대처행동을 고려하면서 자기의 이익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합리적으로 선택한다. 모든 경쟁 주체가 합리적이라는 전제하에서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자가 공화당 예비경선에 뛰어들어 대선에서 승리하는 과정에서 쏟아낸 막말과 예측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 일부 언론은 '정신감정을 받아야 한다'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미치광이 이론'과 게임이론을 설명하며 트럼프의 행동이 고도로 계산된 전략적 행동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20일 트럼프 당선자가 닉슨 대통령의 '미치광이 이론'을 외교전략에 활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트럼프가 당선 이후 대만 총통과 통화해 '하나의 중국' 정책을 뒤흔든 것이나 친러시아 성향의 국무장관을 발탁해 러시아와 화해무드를 보이고 있는 것, 중국 군함이 남중국해 해상에서 미 수중드론을 나포하자 "훔친 드론을 반환할 필요 없다"고 한 것은 '미치광이 이론'의 전형적 수법이라는 얘기다. 예측불허와 전통적 국제규범에 대한 무시라는 자신에 대한 평판을 외교정책에 활용함으로써 상대국을 불안하게 하고 위협해 양보를 끌어내려 한다는 지적이다.

이 분석이 맞다면 트럼프는 대선 기간 의도적으로 자신에 대한 이 같은 평판을 이끌어 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스티븐 브람스 뉴욕대 정치학 교수는 공화당 예비경선 기간이었던 올해 1월 게임이론을 적용해 트럼프의 행동을 승리를 위한 전략 차원에서 분석했다.
브람스 교수는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하고 모호한 행동은 게임이론상 합리적 전략이며 비이성적으로 보이도록 행동하는 것이 오히려 이성적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게임 주체가 상대방의 전략을 예상해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전략을 선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상대방에게 비이성적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위협함으로써 자신에게 유리한 전략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북핵이란 안보위협을 안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의도된 '미치광이'일지도 모를 트럼프 당선자의 전략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성이 시급하게 대두되고 있다.

sjmary@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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