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사설

[fn논단] 꽃피지 못한 정조의 국가개혁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1.02 16:45

수정 2017.01.02 16:45

[fn논단] 꽃피지 못한 정조의 국가개혁

임금이 정사를 보는 용상 뒤편에는 언제나 '일월오봉도' 병풍이 놓여 있었다. 해와 달, 다섯 산봉우리를 그린 이 병풍은 유교 이념에 따라 백성의 태평성대와 국왕의 권위를 상징했다. 그런데 1791년 정조는 오랜 왕가의 전통을 깨고 책을 그린 '책가도' 병풍으로 바꾸었다. 새롭게 지식을 앞세워 국가개혁의 강한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조선 22대 왕 정조는 개혁 군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1세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처참한 죽음을 본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학문에 매진했다.


정조는 개혁 비전으로 새로운 지식을 내세워 국정을 주도했다. 1776년 즉위하자마자 창덕궁 내에 규장각(奎章閣)을 세워 국내외의 많은 책들을 수집하고 인재를 모았다. 당시 중국에서는 서구문물 유입으로 새로운 책이 많이 발간됐다. 정조는 혜안을 갖고 4000권 넘는 방대한 분량의 '고금도서집성'도 거금을 들여 사들였다. 정약용이 화성 축조에 사용한 거중기도 정조가 '고금도서집성' 중 기중기 제작법이 실린 '기기도설'을 내려보냈기에 가능했다. 규장각은 책을 수집하고 편찬하는 곳이지만 새로운 지식과 정보의 집산지로 개혁정책과 인재의 산실이 됐다.

정조는 붕당을 깨기 위해 인적쇄신을 단행했다. 탕평책으로 노론계 외에 채제공을 비롯한 남인과 서명선 등 소론까지 두루 중용했다. 37세 이하 청년 관료들을 모아 규장각에서 왕이 직접 경서 공부를 시키고 시험을 보는 '초계문신' 제도를 운영해 정약용, 서유구 등 인재를 양성했다. 정조는 정치개혁으로 왕권 강화를 도모했다. 규장각을 통해 당파 구분 없이 양성된 젊은 인재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왕이 직접 관할하는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해 병권도 강화했다. 또한 지방 행정에 대해 중앙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수령의 임기를 보장하고, 정약용 등 규장각 인재들을 지방관에 임명하는 한편 수시로 암행어사를 파견해 지방관과 아전들의 부정부패를 막았다.

사회개혁으로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 서얼 출신들을 규장각의 검서관에 임명함으로써 차별 완화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한편 경제개혁으로 일반 소상인도 자유로운 상거래를 허용하는 '신해통공'을 실시했다. 이제까지 허가를 받은 시전상인들에게 부여했던 상행위 독점권인 '금난전권'을 폐지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조는 '대전회통'이란 법전을 만들어 자신의 개혁을 제도화했다.

정조의 개혁은 당대에는 정치적 안정은 물론 문화의 번성을 가져왔다. 하지만 1800년 정조가 49세로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르자 문벌에 의한 세도정치가 등장하고 조선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왜 정조의 개혁은 계속 꽃피지 못했을까. 세상도, 백성도 근본부터 변하고 있었다. 바뀌지 않은 것은 정조 자신이었다.
주자학 중심의 유학의 가치를 고수한 채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에 뿌리부터의 국가개조는 어려웠다. 정조는 서학이란 이름으로 들어온 천주교를 배척했고, 옛 문체를 흩뜨리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박제가를 꾸짖는 등 '문체반정'을 펼쳤다.
세상은 이미 주자학 중심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요청하는데도 말이다.

이호철 한국IR협의회 회장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