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자수첩

[여의도에서]'과도한 자기愛'의 부작용

김태경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1.13 17:33

수정 2017.01.13 17:38

[여의도에서]'과도한 자기愛'의 부작용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빠진 자의 이름은 '나르키소스'다. 그는 아름다운(?) 자기 모습에 취해 연못에 빠져 죽는다. 통상적인 해석은 나르키소스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나르시스트'의 탄생으로 귀결시키지만 실제는 이와 다르다. 그는 자신을 사랑해서 죽은 게 아니다. '자기'와 연못에 비친 '자기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과도한 자기애'이거나 '무지' 때문이라는 것이 좀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나르시스트가 극단화되면 자기와 거울에 비친 자기상을 구별할 줄 아는 '주체의 자각'이라는 과정이 탈각된다.
세상의 중심은 자기로부터 비롯된다는 주관적 환상이 넘쳐난다. 결과적으로 사물을 판단할 객관화의 가능성은 차단되고 다른 해석이 끼어들 공간은 좁아진다. 더 끔찍한 결과는 주체의 소멸이다. 주체는 타자의 시선을 느끼고 자기정립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이런 과정이 생략되면 결과는 참혹하다.

현재 우리가 최순실 사태에서 목도하는 것은 이런 주체의 소멸과 나르시시즘에 갇힌 최고지도자의 기이한 형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반복되는 상투적 '수사'와 미용 목적의 '주사'로 대변되는 그의 이미지는 사회적 소통을 차단하는 핵심 기제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타인과의 철저한 차단, 장막 속에 갇힌 그 공간은 환상의 꿈을 펴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그 매혹적인 공간은 국정의 책임감과 희생정신보다는 자기애에 빠진 나르시시즘의 온상이라는 힐난마저 제기된다.

국가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신념과 감상적 태도는 여기서 비롯된다. '국가가 곧 짐'이라는 14세기 절대주의국가 시대에서 형성된 세계관의 모조품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문제는 권력을 견제하고 제어하는 방어적 제도화가 겹겹으로 포위된 현대사회에서도 이런 세계관이 보편화의 외양을 띠고 정상적 권력으로 군림했다는 점이다. 지도자와의 상상적 동일화도 이런 측면에서 위험한 집단심리다. 국정농단과 권력의 사유화라는 역사의 퇴행적 흐름은 이런 토양에서 방긋 웃는다. 근거 없는 지도자와의 동일시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그간의 역사가 증명해준다. 우상숭배와 독재가 숨쉬는 것은 이런 정서의 틈을 매번 노린다.

이를 덧칠하고 보충하기 위해일까.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을 갑자기 강조하는 최근 정부의 의도도 석연치 않다. 샤머니즘으로 대표되는 현 시국의 이미지를 새로운 욕망의 보충물로 대체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는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이를 그럴싸한 기술로 포장하는 것은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우'를 범하는 격이다.

결과적으로 거울에 비친 모습이 '내가 아니다'라는 언명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찾는 노력이 전도된 의식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원동력이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진정한 내 모습인지는 회의적 시각을 통해 나온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타자의 시선으로만 확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아니다'라는 인식을 할 수 있을 때 주체는 탄생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자는 나르키소스 옆에서 상대방의 말을 따라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작은 '에코'에 만족하거나 '혼밥'을 먹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ktitk@fnnews.com 김태경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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