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특별기고

[여의나루] 전직 유엔 사무총장의 길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2.02 16:50

수정 2017.02.02 16:50

[여의나루] 전직 유엔 사무총장의 길

연구년으로 미국에 있을 때이니 2013년의 일이다. 도서관에서 컴퓨터로 신문을 검색하던 중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중앙에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왼쪽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오른쪽에는 김용 세계은행 총재가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논의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의 제목이 맘에 들었다. '세계를 움직이는 3인'. 세계를 움직이는 세 사람 중 두 명이 한국인이라니. 미국 국적인 김용 총재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자리매김할지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든 한국인 아닌가. 기사를 읽어보니 기자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국제기구를 하나는 한국인이, 또 다른 하나는 한국계(미국인)가 이끌고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렇게 '코리아'에 주목한 이유가 있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war-torn)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은 오늘날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다. 반 총장과 김 총재 모두 한국의 발전과정을 몸소 겪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함께 협력하면 가난한 나라들을 도우려는 국제기구들의 노력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런 요지의 글이었다. 내가 괜히 으쓱해지며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유엔 무용론 등이 무성하지만 유엔은 여전히 국제적으로 영향력 있는 기구다. 사무총장 역시 반기문 전 총장의 말마따나 세계 지도자들과 개인적으로 통할 수 있는 자리다. 전직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쌓아온 각국 지도자들과의 친분 관계는 갑자기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래서 아쉬움이 너무 크다. 반 전 총장의 처신에 대한 말이다. 전직 유엔 사무총장이 국제사회에서 기여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 현직일 때는 강대국 역학관계를 살피느라 제대로 일을 못했을 수도 있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전직 프리미엄을 가지고 움직였다면 현직 때보다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난민 문제, 빈국 개발 문제 등에서 국제적 특사 역할 등도 생각할 수 있다. 좀 다른 차원이지만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예도 있다. 처음부터 전직 대통령이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 아닌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처신했다면 그가 칭찬하던 새마을운동 전파도 훨씬 수월하게 이끌 수 있었을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거의 위인 반열에 올랐던 반 전 총장이다. 장차 국제기구에서의 활약을 기대하며 공부하는 수많은 '반기문 키즈(kids)'들도 그의 후광 덕분이다.

반 전 총장은 불과 20여일 만에 그 같은 자산의 대부분을 까먹어버렸다. 국내외 사람들이 본인에게 기대하는 역할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택을 한 때문이다. 국가적으로 소중한 인물을 우리 스스로 깎아내리기 바빴던 것도 그 결과물이다. 최악의 사무총장, 보이지 않는 인물, 우려만 하는 사람(concern-man) 등 서방 언론의 평가를 우리가 그대로 수용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적대적인 한국 정치판에 뛰어들면서 이제는 거의 기정사실화돼 버렸다. 전직 유엔 사무총장의 금의환향 길이 진창길이 된 걸 이제 와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언론과 정치판의 '나쁜×'들을 비난해봐야 더 누추해질 따름이다. 뜬구름 같은 여론조사와 정치 모사꾼들의 등에 업혀 춤춘 것은 본인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반 전 총장이 정신이 들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걱정은 그가 아직도 무언가 국내 정치판에 '기여하려는' 생각을 내비친다는 점이다.
반 전 총장은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에게 걸었던 국제사회의 기대가 무엇이었는지를 이제라도 다시 상기해야 한다.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국제무대의 주요 국가로 성장한 한국의 비결이 무엇인가. 몸소 겪은 그 경험을 국제사회와 나누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다.
김용 총재와 함께라면 더 좋은 일이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함께라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노동일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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