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순의 느린 걸음]

정치꾼의 상상으로 만든 공약 '통신비 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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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대선공약으로는 처음으로 가계통신비 인하를 내걸었다. 이 공약을 실현할 주무부처인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에 '대통령의 멘토'로 불렸던 최시중 위원장이 선임됐다. 최 위원장은 취임 1년 만에 "정부가 인위적으로 통신비를 내릴 수도 없고, 내려서도 안된다"고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민간 통신회사들이 경쟁에 의해 결정하는 통신요금을 정부가 내리거나 올리라고 개입할 정책 근거가 없다는 말이었다. 또 이동통신 가입자 1인당 한달 1000원씩 요금을 깎아줘봐야 국민들이 '공약 실현'을 체감도 못하지만, 이로 인해 연간 6조원의 통신산업 투자여력이 줄어드는 부작용은 국가적 손해라는게 최 위원장의 설명이었다. 사실상 통신요금을 인하하겠다는 대선 공약이 잘못 만들어졌음을 인정한 셈이었다.

당시 방통위의 한 공무원은 "공약을 만드는 과정에 산업과 실제 시장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었다"며 "선거캠프의 소위 정치꾼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상상력만으로 공약을 만들어 결국 실현할 수 없는 공약(空約)만 내놓고 한국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을 5년 내내 힘들게 하고 있다"고 공약 작성 과정의 문제점을 토로했었다.

또 대선 시즌인가 보다. 각 정당들이 일제히 통신비 인하 공약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고 한다. 핵심 내용은 무선인터넷 비용이다. 전체 무선인터넷 요금을 인하하겠다는 당도 있고, 스타트업(창업초기기업)들에 무선인터넷 비용을 깎아줘 창업을 활성화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내는 당도 있단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다. 10년 전에 이미 실현 가능하지 않고, 실현해서도 안된다고 인정된 실패한 아이디어가 다시 공약으로 떠오르는 이유가 뭘까. 아마도 정치꾼들의 상상으로 공약을 만들고 있기 때문 아닐까. 스타트업에 무선인터넷 요금을 깎아주겠다는 공약 아이디어를 들은 한 스타트업 사장은 "무선인터넷 기반 사업을 하겠다는 사장이 제대로 무선인터넷 요금 한번 내보지 않은 채 서비스를 만든다면, 그 서비스가 실제 얼마나 많은 무선인터넷 요금을 유발하는지 감안해가며 만들 수 있겠느냐"며 "스타트업들이 창업 후 겪는 어려움의 실체는 무선인터넷 요금 부담이 사업 진행과정에서 무수히 얽혀 있는 행정규제 때문"이라고 짚어냈다.

결국 시장에 나가 국민과 전문가들의 얘기를 신중하게 듣고 이를 반영해 공약을 만들지 않은 게 10년 전 실패공약을 다시 꺼내들 수밖에 없는 원인 아닌가 싶다.
책상머리에서 요금 깎아준다면 싫어할 국민이 없을 테니 그저 공약부터 만들고 보자고 내놓은 공약 아이디어 아닌가 말이다. 정치꾼의 상상력에 시장의 현실, 산업의 흐름을 결합해 공약을 만들어야 한다. 시장의 현실과 산업의 흐름이 빠지고 상상력으로만 버무려진 공약은 국민과 국가에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각 선거캠프가 다시 새겼으면 한다.

cafe9@fnnews.com 이구순 정보미디어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