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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조선시대 '은광(銀鑛)' 민영화를 주장했던 학자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6.05 17:13

수정 2017.06.05 17:13

[fn논단] 조선시대 '은광(銀鑛)' 민영화를 주장했던 학자

일본 시마네현 오다시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와미(石見)은광이 있다. 일본이 이 은광을 세계유산으로 꼽은 이유는 이로 인해 서양과 교류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광의 웹페이지에는 이것이 조선 기술자 덕분이라고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광석에서 은을 분리하는 '회취법'은 1533년 하카다의 부자 상인 가미야 주테이가 조선반도에서 불러온 경수와 종단이라는 기술자에 의해 국내에서는 이와미은광에 최초로 도입되었다…이 회취법의 도입으로 일본은 비약적으로 양질의 은을 증산해 동아시아에서 경제변혁과 동서문화교류의 길을 열었다."

16세기 대항해시대, 포르투갈·네덜란드 등 유럽이 우리나라를 제치고 일본과 교역한 이유에 은이 있었다. 한때 이와미은광은 세계 은 생산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산지가 됐다.
일본은 이 은을 바탕으로 서양의 기술과 문물을 들여와 경제를 부흥시켰고, 이때 들여온 조총으로 조선침략전쟁을 일으켰다.

그런데 은에 관한 한 조선이 선진국이었다. 연산군 9년(1503년) 5월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양인 김감불(金甘佛)과 장례원 노비 김검동(金儉同)이 납에서 은을 분리해 바치며 아뢰기를,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분리할 수 있는데, 납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하니, 임금이 시험해 보라고 명했다."

이들이 회취법이란 제련법을 고안해냄으로써 대량의 순은 추출이 가능해졌다. 단천은 은 산지로 변모했고, 영흥 등지의 납 산지에서도 은 제련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조정은 이 기술을 무시했다. 은은 사치품이며 중국이 조공으로 빼앗아 갈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중종은 1516년 은광 폐쇄를 명했다. 그러자 일본이 조선의 제련기술자를 데려가버린 것이다. 그 후에도 은광 재개에 대한 논의가 몇 차례 있었다. 이때마다 조정은 농민들이 농사 짓지 않고 광업에만 매달릴까 하는 우려 때문에 계속 불허했다.

그러나 명쾌한 해법을 제시한 인물이 있었다. 1788년 칠순의 우정규(禹禎圭)는 정조에게 45편의 치국개선책인 '경제야언(經濟野言)'을 올렸다. 그는 '은광을 금지하지 말라는 논의'란 항목에서 이렇게 건의했다. "만약 조정에서 각도에 공문을 보내, 은을 생산하는 고을에서는 은을 만들어 상납하도록 하면 지방관은 부득불 농사꾼을 강제로 징발해 은을 생산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농사를 폐하게 할 참이니, 그런즉 진실로 민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조정에서 은이 있는 곳에다 광산을 설치하도록 허가만 하면 부유하고 큰 상인은 각자 재물을 내어서 삯꾼을 모집할 것이며, 땅이 없어 농사 짓지 못하는 백성이 광부가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곳에 모여 살며 땅을 파고 은을 지어서 지방관청과 감영, 또는 본 고을에 세를 바치고 남는 대로 밑천 댄 사람에게 돌리며, 땅 없는 백성도 또한 이것에 힘입어서 생활할 것인즉 공사 양쪽으로 이로운데 어찌해서 민폐가 됩니까." 정부가 은광 경영을 민간에게 맡긴다면 일자리 창출, 세수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정은 묵살해 버리고 만다.

이호철 한국IR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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