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 칼럼] 왜 ‘서민을 위한 개혁’은 서민을 힘들게 하나

김관웅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08.27 16:54

수정 2017.08.27 16:54

[데스크 칼럼] 왜 ‘서민을 위한 개혁’은 서민을 힘들게 하나

왕망, 왕안석, 주원장…. 이 세 명의 공통점은 중국 역대 왕조에서 가장 농민을 사랑한 개혁가이자, 실패한 이상주의자라는 점이다.

왕망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서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개국한 사람으로, 백성들의 추앙을 받아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만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끔찍했다. 이 때문인지 왕망은 새 나라를 세우자마자 나라의 근본인 농민과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대대적 개혁에 나섰다. 먼저 지방호족들의 땅을 몰수해 땅이 없는 농민에게 나눠줬다. 이른바 '왕전제'다. 또 서민들의 고리대금 피해를 줄여주기 위해 화폐개혁도 단행했다.
이 외에도 노비제 폐지 등 많은 개혁을 도입했다. 이토록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였지만 왕망은 서기 23년 장안성에서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민란군에 포위된 채 부하의 칼에 생을 마감했다. 왕망의 개혁은 모두가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왜 민란을 일으켰을까. 그것은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에 치우치다보니 오히려 개혁이 백성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시행한 왕전제와 노비제 폐지는 이미 경제 사유화가 진행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역행한 것이었다. 특히 왕전제는 기득권층인 지방호족의 반발을 초래했다. 또 농민들로부터도 나라로부터 땅을 받은 농민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갈등은 결국 민란을 불러왔다.

왕안석은 1067년께 북송 왕조의 걸출한 경제학자다. 청묘법과 균수법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청묘법은 국가가 은행 역할을 맡아 벼가 익기 전에 푸른 벼를 담보로 저리의 금리로 소액대출을 해주던 제도였다. 또 균수법은 발운사라는 관청을 두고 조정에서 필요한 물자를 가격이 가장 낮은 곳에서, 가격이 같다면 가까운 곳에서 구매하도록 해 정부의 조달비용을 크게 줄인 혁신적 제도였다. 그러나 조정의 의도와 달리 청묘법을 집행하는 관료들은 백성을 상대로 고리대금을 붙여 백성들을 가난으로 내몰았다. 또 조달물자를 재이동시켜 시세차익을 챙기는 부패를 저지르면서 균수법도 물거품이 됐다.

주원장은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다. 그러나 출신이 목동으로, 민중봉기를 통해 황제까지 올랐던 중국 역사상 가장 비천한 황제이기도 했다. 주원장은 어린 시절 부모가 굶어죽는 것을 직접 본 충격에 황제가 되어서도 부패한 관리를 산 채로 껍질을 벗겨 죽일 정도로 미워했다. 그러나 어려운 백성들에게는 한도 없이 어진 군주였다. 실제로 황제에 오른 뒤 7년째 되던 해에는 수도인 난징의 빈땅에 커다란 기와집 260채를 지어 집 없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반대로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지방 대지주나 농민의 이윤을 갉아먹는 상인은 철저하게 탄압했다. 백성들로부터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로 인해 대지주와 상업계층이 사라지자 명나라 경제는 일시적으로 대량생산이 사라지고 더 이상의 부를 창출할 수가 없어 크게 뒷걸음질쳤다. 서민의 삶이 그 이전보다 더 어려워진 것은 당연했다.

이들의 개혁은 모두가 서민을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때마다 기이하게도 농민의 삶은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에 대해 1600년대 명나라 말기의 사상가 황종희는 이를 '황종희의 법칙'이라고 했다.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에 치우친 섣부른 개혁이나 분풀이식 개혁은 반드시 더 큰 재앙을 부른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새 정부가 들어섰다.
정치·경제 전반에 대대적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그러나 곳곳에서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400여년 전 황종희가 우려한 개혁과 혹시 닮아있는 게 아닌지 한번쯤은 되새겨볼 문제다.

kwkim@fnnews.com 김관웅 건설부동산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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