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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 레저] 南道 비밀의 서원이 열립니다

조용철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10.19 19:25

수정 2017.10.19 22:16

해남 수묵기행  윤씨 고택 녹우당서 수묵걸작 만나고
목포 정원산책  성옥기념관 백제의 정원을 지나
광주 월봉서원  살아숨쉬는 전통문화 직접 느껴볼까
성리학의 기운이 숨쉬는 월봉서원에서 '이크 에크'
남도 명소 둘러보고 전통문화 체험도 하는 일석이조 여행
월봉서원에서 여행객들이 서책 만들기 체험을 하고 있다.
월봉서원에서 여행객들이 서책 만들기 체험을 하고 있다.

【 해남(전남)=조용철 기자】 ‘예향 남도'를 상징하는 것 중에는 '포장마차에도 그림이 걸려 있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전라남도는 역사적 정통성과 실질에 있어서 우리나라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의미다. 특히 진도의 운림산방은 소치 허련(1809~1892)에서 비롯된 남종화의 맥을 계승하고 있다. 이 같은 전통성을 바탕으로 발전한 남종화는 진도는 물론 남도 전체를 '예향'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근대 이후 급변한 사회 상황에 '예향 남도'의 가치가 퇴색하고 쇠락했다. 이에 운림산방으로 대변되는 '예향 남도'의 전통과 덕목을 계승하고 이를 현대적 가치로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전통문화 체험과 관광의 접목도 새로운 가치 창출을 위한 노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10개의 전통문화 체험관광 프로그램 중 전남 해남의 '예술이 꽃피는 해안선, 예술가와 함께하는 남도 수묵기행'과 광주의 '비밀의 서원 월봉' 프로그램을 직접 체험해봤다.

해남으로 가기 위한 길목에 자리잡은 전남 목포. 목포 유달산 아래 자리한 성옥기념관은 포항제철과 광양제철을 지을 때 벽돌을 공급한 조선내화 창업자인 고 이훈동(1917~2010)의 88세 미수를 기리기 위해 자녀들이 건립한 문화공간이다. 유달산 등구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 목포 시민과 목포를 찾는 여행객들의 문화 쉼터로 자리잡고 있다.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을 사랑했던 이훈동은 작품을 보존하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 덕분에 추사 김정희, 소치 허련, 남농 허건 등 당대 최고의 작가들의 작품과 남도지역 예술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성옥기념관이 세워지게 됐다.

이승미 행촌미술관 대표는 남농 허건의 작품을 설명하면서 "소치 허련의 손자인 남농 허건은 생전에 10만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남농이 다작을 했다는 이유로 저평가받고 있다. 많이 그렸다는 것은 덕목으로 봐야지 이를 폄하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백제 양식의 별서정원으로 가꾼 이훈동정원
백제 양식의 별서정원으로 가꾼 이훈동정원


성옥기념관 뒤편으로는 전남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이훈동 정원'이 자리잡고 있다. 목포 유달산 남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훈동 정원은 1930년대 일본인 우치다니 만페이가 만든 일본식 정원이었다. 해방 이후 해남 출신의 국회의원 박기배씨가 소유했던 것을 1950년대 이훈동씨가 매입한 이후 60여년이 지나는 동안 일본식 정원의 특징은 사라지고 백제 양식의 별서 정원(別墅庭園·벼슬 하지 않고 자연에 귀의해 전원에 만든 정원)으로 가꿔졌다. 개인 정원으로는 호남 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로 입구정원, 안뜰정원, 임천정원, 후원으로 이뤄져 있어 여행객들에게 아기자기한 정원의 모습을 선사한다.

윤두서 자화상
윤두서 자화상

■해남 윤씨 고택인 녹우당

조선조의 문신이자 국문학상 대표적 시조시인으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1587~1671) 유적지가 있는 전남 해남에는 해남 윤씨 고택인 녹우당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표적인 종택이자 전통 고가로 잘 알려져 있다. 녹우당에 들어서면 600년 된 은행나무가 이 집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말해주듯 여행객들을 압도한다.

'ㅁ'자형 구조의 톡특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녹우당 안채 마당 화단엔 작은 굴뚝과 함께 여러 화초가 심어져 있어 좁은 공간에서도 자연을 직접 느낄 수 있다. 이곳에는 현재 14대 종손인 윤형식씨가 실제 거처하고 있다.

윤씨는 수시로 비자나무 열매로 만든 강정과 말린 생강 등 다과를 여행객들에게 내놓고 유적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윤씨는 담담하게 "앞으로 이곳에 미술관을 짓는 것이 목표"라며 향후 계획을 밝혔다.

유물전시관에서는 윤선도의 증손인 공제 윤두서(1668~1715)가 직접 그린 자화상을 비롯해 해남윤씨 가전 고화첩, 윤선도 종가 문적 등 소중한 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국보 제240호로 지정된 윤두서 자화상은 한국 미술사에 빛나는 수작으로 이 그림을 보기 위해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는 여행객들이 많다. 공제의 할아버지인 윤선도는 병자호란 후에 주로 완도의 보길도와 해남의 수정동 및 금쇄동에 은거하고 원림을 경영하면서 연시조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겨 조경문화와 국문학 발전에 큰 공을 남겼다.

해남 고산사당
해남 고산사당

울돌목에서 바라본 우수영관광지
울돌목에서 바라본 우수영관광지

■명량대첩해전사 기념전시관

1597년 9월 해남 어란포를 출발한 일본 왜선 133척은 밀물을 타고 유유히 명량해협에 모습을 드러낸다. 당시 이순신에겐 칠천량 해전에서 도주한 배설로부터 인수한 12척의 배와 이후 수선한 배 1척 등 총 13척의 배만 존재했다. 이순신은 대규모 왜군과 싸울 수 있는 곳은 우리나라 바닷길 중 가장 협소하고 물살이 빠른 울돌목(명량해협)이라고 판단했다.

이순신은 '죽으려 하면 살 것이요, 살려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라고 외치며 대규모 왜군 앞에서 두려워하는 조선수군을 독려해 필사적인 전투를 벌인다. 전투 중 물살이 조선수군에게 유리한 썰물로 바뀌자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대파된 적 왜선 31척, 전함으로서 기능을 상실한 적선은 무려 92척, 세계 해전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승이었다. 바로 그 유명한 명량대첩이다. 명량대첩해전사 기념전시관에선 승리의 기운이 담긴 울돌목을 바라볼 수 있는 3층 외부전망대뿐 아니라 일본의 전함 세키부네(關船)를 타고 명량대첩의 시작부터 대승의 순간까지 격전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는 4D 영상관까지 갖춰져 있어 명량대첩을 보다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한 여행객이 월봉서원에서 고봉묘소로 올라가는 철학자의 길에서 책을 읽고 있다.
한 여행객이 월봉서원에서 고봉묘소로 올라가는 철학자의 길에서 책을 읽고 있다.

월봉서원의 너브실마을밥상
월봉서원의 너브실마을밥상

■사단칠정 논쟁으로 유명한 월봉서원

조선 중기 성리학자 고봉 기대승(1527~1572) 사후 6년인 1578년, 호남 유생들이 지금의 광주 광산구 신룡동인 낙암 아래 망천사라는 사당을 세웠다. 이후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어 지금의 산월동인 동천으로 옮겼는데 1654년 효종이 '월봉'이란 서원명을 내리면서 월봉서원이 지어졌다. 하지만 월봉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고 1941년 현재의 위치에 빙월당을 새로 짓고 사당과 장판각, 내삼문, 외삼문을 건립해 1981년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월봉서원에서는 현재 청소년과 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문화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월봉서원은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 13년 동안 주고받은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으로 유명하다. 두 사람이 나이나 지위에 구애받지 않고 벌어진 사상 로맨스는 한국 성리학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 논쟁을 벌였던 성리학자 고봉 기대승을 기리는 광주 월봉서원 마루에 여행객들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조용철 기자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 논쟁을 벌였던 성리학자 고봉 기대승을 기리는 광주 월봉서원 마루에 여행객들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조용철 기자

한국 성리학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광주 월봉서원 앞마당에서 어린 학생들이 우리나라 전통 무술인 택견 수업을 받고 있다. 사진=조용철 기자
한국 성리학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광주 월봉서원 앞마당에서 어린 학생들이 우리나라 전통 무술인 택견 수업을 받고 있다. 사진=조용철 기자


월봉서원을 뒤로한 채 찾아간 곳은 해창주조장이다.
해창주조장의 살림집과 정원은 일본 군마현에서 태어나 강진을 거쳐 해남에 정착해 살던 일본인 시바다 히코헤이에 의해 1927년 조성됐다. 이후 강진에서 불을 빚던 황의권씨가 벼 300섬을 주고 주조장을 인수해 3대 주인이 됐고 지난 2008년 오병인, 박리아씨 부부가 주조장을 매입해 4대 주인이 됐다.
술 면허를 낸 회사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전라도 외 지역에선 양조장이라는 이름을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하지만 전라도에선 대부분 주조장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yccho@fnnews.com 조용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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