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공연 리뷰] 옥상 밭 고추는 왜

박지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10.25 20:47

수정 2017.10.25 20:47

당신도, 이웃도… 안녕하신가요?
[공연 리뷰] 옥상 밭 고추는 왜

어릴적엔 있었던 것 같은데 사라져버린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동네'다. 과거에는 마을 곳곳에 드문드문한 가구들끼리도 누구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서로의 형편을 잘 알았다. 그러다 도시가 생기고 서로 조금 더 가까이 살게 됐다. 1980년대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앞집과 옆집 사이에 서로 주고 받고, 오가는 게 있었다. 집과 집 사이 담장이 있었지만 말을 주고받고 때론 까치발을 들어서 너머로 훌쩍 보며 무슨 일이 있는지 적당히 넘겨 짚을 수 있었다.


근데 그 동네마저 사라지고 1990년대 아파트와 연립주택, 빌라들이 들어서면서 사뭇 달라졌다. 집과 집 사이 창문 없는 벽 너머에 누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지 못하게 됐다. 오가다 가끔 마주치지만 서로의 형편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니 가깝게 산다는 게 오히려 더 불편해졌다. 요즘은 더한 것 같다. 아파트와 주상복합건물 속에서 사는 우리에게 이제 이웃은 때로 위협적인 대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과 사람 간의 물리적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는데 심리적 거리는 오히려 멀어졌다.

마을 공동체가 사라진 서울. 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사진)는 이런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1990년대 즈음 지어져 페인트 칠도 다 벗겨지고 외풍이 심할 것 같은 허름한 빌라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갈등을 보여준다. 낡은 빌라지만 304호 광자 아줌마와 303호 동교는 이곳을 떠나서는 갈 곳이 없기에 소중하고, 201호 현자 아줌마는 어서 재개발을 해야 부동산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재개발에 동의를 하지 않은 304호 아줌마가 유일한 낙으로 옥상에서 키우는 고추 때문에 벌레도 더 많아지고 거름 냄새도 가시질 않는 것 같으니 201호 아줌마에겐 눈엣가시다. 결국 두 사람은 충돌하는데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은 고추 서리를 통해서다. 201호 아줌마가 304호 아줌마가 애지중지하던 고추를 싹쓸이하고선 적반하장으로 심한 욕을 퍼붓고, 충격을 받은 304호 아줌마가 시름시름 앓다 연립주택 앞에서 쓰러진 뒤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를 지켜본 301호 현태가 나서서 대립하게 되고 303호 동교가 뒤에서 은밀히 돕기 시작하면서 빌라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위 아래 세 칸씩 짜여진 벌집 같은 사각틀 안에 사는 사람들은 그 안의 공간 안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지만 시멘트 벽에 가로막혀서 이웃의 어려움은 알 수 없다.
20여명이 넘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늘어놓아 처음엔 정신없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깔대기처럼 하나로 합쳐진다. 각자의 공간에서 외롭게 버티며 열심히 살아온 우리.

힘들게 살았지만 그로 인해 받은 대가는 내 노력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고 남들은 그렇지 않아보여서 나만 더욱 서럽고 화나는 것.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쏟아낼 곳이 마땅치 않아 우리는 서로에게 점점 더 괴팍해진다.
불황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보듬어야 하는가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공연은 2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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