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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 적폐청산의 명분과 현실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11.01 17:13

수정 2017.11.01 17:13

[여의나루] 적폐청산의 명분과 현실

"적폐청산은 편 가르기나 앞의 정부를 사정하거나 심판하는 것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달 28일 세계한상대회 간담회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문 대통령은 "적폐는 오래 쌓인 폐단"이라며 "앞의 정부에서만 아니라 광복 후 성장만능주의, 물질만능주의 같은 사상을 추구하는 사이에 생겨난 폐단을 말한다"고 정의했다. 이어 "그런 오랜 폐단을 씻어내고 정말 정치를 바르게 해서 정의로운 대한민국, 나라다운 나라로 만들자는 그런 뜻"이라고 말했다.

전임자 처벌이 적폐청산의 목적이 아니라는 문 대통령의 말은 새로운 게 아니다. 지난달 10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도 유사한 발언이 나왔다.
"적폐청산은 사정이 아니라 권력기관과 경제, 사회 등 전 분야에 걸쳐 누적되어온 관행을 혁신해 나라다운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대선 과정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있었다.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인식이다. 곳곳에 쌓인 묵은 때를 벗겨내고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자는데 반대할 사람이나 세력은 없을 것이다. 정치보복이라는 야권의 주장도 당장 자신들에게 불이익이 돌아오는 상황에 대한 반발이다. 바르게 해야 할 것이 비단 정치만이겠는가. 모든 분야에서 과거의 역동성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나라다. 구조와 시스템 재편으로 나라 전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야 할 필요성도 크다. 문제는 현재까지 보여주는 적폐청산의 현실이 명분과 달라 보이는 점이다. 사정과 심판, 수사와 처벌의 모양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속도를 높이는 국정원 관련 수사부터 그렇다. 국정원의 정치관여나 뇌물공여 등 실정법 위반사항은 단호하게 처벌해야 한다. 대한민국 보위에 나서야 할 소중한 국가 정보기관을 정권 수호에 동원한 책임자들도 심판대에 세워야 마땅하다. 그렇게 하면 국정원이 환골탈태할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임 정부에 충성한 정보기관 관련자들을 쫓아내거나 처벌하는 풍경은 익숙하다. 정작 대한민국의 적을 상대하는 정보기관의 역량은 그때마다 약화되어 왔다. 외국에서 금기시되는 정보기관 종사자들의 신원공개도 여과 없이 이뤄지고 있다. 정치권은 따라서 과거 사실 폭로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수사는 검찰에 맡기고 정보기관에 대한 정치 외풍을 차단하는 구조개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공영방송 사태도 그렇다. KBS, MBC 파업의 목적은 거의 달성됐다. MBC와 관련, 전 정권에서 임명된 방문진 이사들을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지배구조가 여권에 유리하게 된 이상 방문진 이사장이나 사장도 새로 임명할 수 있다. KBS 역시 시간문제다. 집권세력이 총동원된 압력을 끝까지 이겨낼 수 있는 이사진이나 경영진은 없다. 과거 숱하게 목격한 결론이다. 안 봐도 비디오다. 그래서 '공영방송 정상화'가 되면 모든 게 새로워질까. 영향력 행사 주체가 교체되었을 뿐, 정치에 휘둘리는 방송 현실은 여전할 것이다. 어떤 정치세력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이미 해법도 나와 있다. 하지만 정치권은 욕설, 막말, 삿대질을 동원한 싸움에만 관심이 있다. 공공기관 낙하산 문제도 마찬가지다. 묵은 걸 새 낙하산으로 바꾸기만 하면 공공기관이 새롭게 탄생할까. 5년 뒤 또 다른 인사태풍을 예비하고 그동안 국민 부담만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런 걸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게 바로 적폐청산이다. 문 대통령의 발언이 명분만 아니라 현실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길이 그것이다.
'너희도 그랬으니 우리도'라고 한다면 청산만 있고 재조(再造), 즉 새로움은 없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이른바 촛불정신 역시 나라의 근본을 혁신하라는 요구이다.
기득권 세력 교체에만 쓰인 촛불이라면 너무나 허망한 촛불이 아닐 수 없다.

노동일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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