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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인사전횡이 불러온 역사의 반전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11.02 16:55

수정 2017.11.02 16:55

[fn논단] 인사전횡이 불러온 역사의 반전


조선에도 잘 짜여진 인사제도가 있었다. 공정한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제, 권문세가를 찾아다니며 인사 청탁하는 것을 금한 분경(奔競)금지제 등이 그것이다. 조선조 500년간 배출된 1만4000여명의 문과 급제자는 10명 중 4명꼴인 5000여명이 중인과 평민 출신이었다고 하니 과거제가 공정한 인재등용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어느 자리에 임용되느냐였다. 조선의 법제는 이조와 병조의 당상관 등 분경금지 대상을 열거하고 이를 어긴 자는 곤장 백대, 유배 삼천리 등 엄한 벌을 적고 있지만 권력자의 정실인사는 왕조 내내 끊이지 않았다.

왕조실록에는 권력 핵심에게 인사청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분경을 완화한 예가 보인다.
성종1년(1470) 1월 11일 한명회와 신숙주는 임금에게 분경의 법이 지나쳐 만남을 어렵게 하는 폐단이 있다고 아뢰었다. 왕은 닷새 뒤 완화하라고 명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성종은 당시 신숙주, 한명회 등 9명 원로대신을 원상(院相)으로 지명하여 국정 자문을 받고 있었다. 성종5년 1월 23일자에는 사헌부가 법전에 열거된 분경금지 관직에 임시로 설치된 원상이 빠졌지만, 원상의 권력이 중하므로 분경금지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고 건의하자 왕이 거부한 기록이 나온다. 임금은 "'대전'에 비록 분경을 금하는 것을 실었다 할지라도 특별히 정책 집행자를 가리켰을 뿐이다. 더구나 원상은 정사에 관여한 일이 없지 않으냐. 그것을 말하지 말라"고 끊었다.

세조13년(1467) 함길도 길주 호족 출신 이시애가 난을 일으켰다. 지방관, 특히 북방의 지방관에는 고려 때부터 인망 있는 지방인재가 등용되었는데, 세조 이후 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해 중앙 권력가와 연줄 없이는 불가능해졌다. 그러자 관직 진출이 막힌 북도인들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예종1년(1468)에는 남이가 옥사 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여러 무공으로 남이 장군이 세조의 총애를 받아 27세에 병조판서가 되자, 훈구파들이 역모혐의를 씌워 그를 옥사시켰다. 세조를 옹립해 중흥을 도모한 공신들의 인사전횡은 권력에 줄을 세우고 새로운 인재의 싹을 잘라버린 것이다.

성종5년, 세조 때부터 편찬했던 국가통치의 기본법인 '경국대전'이 완성되었다. 성종7년에는 수렴청정과 원상들의 국정자문을 끝내고 성종이 직접 통치에 나섰다. 바야흐로 창업의 시대는 가고 수성의 시대가 온 것이다. 성종9년 11월 30일 홍문관 부제학 성현 등이 즉위 10년이면 인사도 변해야 한다며 상소를 올렸다. "옛 어진 임금이 세상에 바른 정치를 베푼 것은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옳게 임용하는 데 달렸을 뿐입니다"고 하면서 "전하께서는 여러 의견을 널리 채택하고…어진 행실을 깊이 살펴서 진출시키고, 요행을 바라는 무리로 하여금 함부로 진출하지 못하게 한다면 많은 업적이 모두 이루어져 국가가 자연 평안하게 될 것입니다"고 했다.
진취적 기상으로 조선창업을 이끈 훈구파는 제 식구 챙기기에 급급해 새 시대에 맞는 인재를 키우지 못했다. 대신, 새로운 인물로 조선 건국에 반기를 들었던 옛 고려의 길재, 정몽주의 학풍을 이은 김종직이 발탁되었다.
사림파의 등장이다.

이호철 한국IR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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