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 스포트라이트, 토익이 뭐길래]

(1)'토익감옥'에 스스로 몸 맡긴 취준생들

우리사회는 '토익공화국'이라고 불릴 만큼 토익(TOEIC)이 취업의 필수요소로 자리 잡았다. 국내 첫시험이 치러진 1982년 응시자는 73명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한해 200만명 가량에 달한다. 토익이 예전 같지는 않다는 말도 있지만 여전히 국가시험에서 영어과목을 토익점수로 대체할 정도로 취업에서 비중이 높다. 파이낸셜뉴스는 초등학생부터 승진을 준비하는 중년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관문으로 자리잡은 토익의 실태와 문제점, 대안 등을 심층 진단하는 시리즈를 게재한다.

경기 군포의 T토익기숙학원 학원생들은 모두 같은 단체복을 입는다. 토익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학원 규칙으로 '통성명 및 대화 금지'가 있다. 20대 취업준비생들은 서로를 번호로 부른다./사진=T학원 제공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수업 마치겠습니다"
수업이 끝났다는 강사 말에도 강의실 안은 적막했다. 지난달 28일 오전 10시 경기 군포의 T토익기숙학원 학원생들은 쉬는 시간인데도 서로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그들은 단체복을 입은 채 묵묵하게 영어단어 카드를 뒤적일 뿐이었다.

국내 최초의 토익기숙학원인 이곳에서는 수강생들이 7주간 주 6일 하루 14시간씩 토익을 공부한다. 근처 고시텔, 원룸 등에 머무르며 오전 8시 등원해 밤 10시까지 토익과 씨름한다.

'통성명 및 대화 금지'는 이 학원의 내규다. 한 반에 20여명 되는 취업준비생들이 모였지만 서로 이름도 모른다. 이들은 번호로 서로를 부른다. 간혹 3호님, 혹은 4호님이라고 부르며 연필이 떨어졌다고 알려줄 뿐이다.

이밖에 △음주금지 △사랑고백금지 △휴대폰 사용금지 등의 규정이 있다. 어기면 학원에서 퇴출된다. 학원생들은 성인이지만 '토익 감옥'에 스스로 몸을 맡겼다. 실제 T학원 상징문양은 쇠창살 모양이다. 단시간 내에 토익 만점 990점에 다가가려면 그만큼 자유를 포기해야 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점수가 최고 목표..."남 신경 쓸 때 아냐"
'비인간적이다' '성인인데 뭘 그렇게까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들의 상황은 절박하다. 희망하는 직장에서 토익점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조모씨(29)는 마음이 더욱 초조하다. 미술대에서 실내디자인을 전공한 조씨는 대기업 건설사 입사 후 인테리어 업무를 희망한다. 그는 기숙학원에 다니는 데 대해 "남의 시선을 신경쓰기보다 혼자 노력해야 할 시기"라며 "토익이 원하는 일에 쓰이지는 않지만 안타깝게도 너무나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7주를 꿋꿋하게 참아낸 박모씨(26)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박씨는 PEET(약학대학입문자격시험)를 1년간 준비하다 시험응시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토익점수가 필요해 학원에 등록했다. 2018년 약학대학 모집요강 기준으로 35개교 중 33개교가 지원 자격에 토익을 활용한다. 1년간 PEET 시험을 준비하다 보니 7주간의 토익공부가 그리 힘들지 않다고 한다. 박씨는 "토익은 단기간에 성적을 내는 시험"이라며 "같은 반 학생들과 짧게 만나는 것이어서 애써 친해지기도 어렵다"고 털어놨다.

고모씨(25·여)는 항공사 승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다. 합격하기 위해서는 최소 750점 이상을 받아야 한다. 고씨는 학원강사에게 질문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7주간 다른 학생과 거의 대화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씨는 휴일에도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고시원에 돌아와 잠깐 먹방BJ 동영상을 시청하는 것. 그는 "토익을 못하면 다른 것도 못한다는 각오로 공부했다"며 "기본적인 자격증이라고 판단돼 열심히 했다"고 설명했다.

이 학원 임모 원장은 "토익기숙학원에서 공부하기 위해 전국에서 학생들이 온다"며 그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임하다보니 학원을 운영한 3년 동안 1차례도 규칙을 어긴 사람이 없다"고 전했다. 그는 "단순 취업을 위해 오는 학생들보다 대형병원 간호사, 항공사 등 토익을 반드시 요구하는 직업을 원하는 학생이 몰린다"며 "최근 토익 효용성에 대한 논란이 있고 블라인드 채용 등으로 토익을 요구하는 회사가 줄고 있지만 여전히 특정 직군에서는 필수"라고 말했다.

바쁜 스케줄 때문에 카카오톡을 이용한 토익공부도 성행한다. 스터디원간 단톡방을 만들기도 한다. 최근에는 카톡으로 인공지능과 토익단어를 공부하기도 한다./사진=캡쳐

■카톡 토익 스터디부터 인공지능 학습법까지
최근에는 일상에서 가능한 새로운 형태의 토익 공부가 떠오르고 있다. 매분 매초 휴대폰을 울리는 카카오톡 토익 스터디가 그것이다. 네이버 카페 토익캠프는 카톡스터디를 모집하며 "바쁜 학기 중 쉽게 공부하세요!"라는 광고문구를 내걸었다. 카톡스터디는 스터디원이 돌아가면서 단체카톡방에 예상문제와 빈출 단어를 보내면 답변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사람이 아닌 인공지능과 토익공부를 함께 하기도 한다. 보카봇은 카톡친구를 등록하면 단어 암기를 도와준다. 단어를 보고 뜻을 생각해 버튼을 누르면 된다. 틀리거나 늦게 답한 단어가 있으면 나중에 복습기회를 준다.

고강섭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청년 구직자들이 토익에 몰입하는 현상에 대해 "다른 어떤 것보다 스펙이 우선시 되는 사회"라며 "사회가 토익을 강요하고 청년들이 그에 부응하려다 보니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기숙학원도 등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 교수는 "카톡스터디는 관계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돌아선 결과물"이라며 "청년들은 스터디가 내게 도움이 되는지 여부에만 집중한다. 점수를 위해 인간관계를 쉽게 끊고 이을 수 있는 카톡에 편리함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스포트라이트팀 박인옥 팀장 박준형 구자윤 김규태 최용준 김유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