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로]

호리병난과 결혼기념일

학명 놀리나, 백합목, 미국 텍사스주에서 캘리포니아주를 거쳐 멕시코에 이르는 온대성 사막지대에서 자생. 일명 호리병난의 이력이다. 밑둥이 공처럼 둥글고 위로 쭉 뻗으며 이파리는 난처럼 가늘다. 그래서 난이라는 말이 붙은 모양이다. 줄기를 보면 난이라기보다 나무에 가깝다. 호리병처럼 생겼다고 해서 호리병난, 사케 병인 도쿠리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도쿠리난(독구리난)으로도 불린다. 그렇지만 장미나 선인장처럼 공식적인 한국 이름은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24년 전인 1993년 12월 12일은 내가 결혼한 날이다. 그러니까 24주년 결혼기념일이 20일 남짓 남았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꽃과 식물을 좋아하는 나는 단칸방 시절 베란다 등 공간이 없어 식물을 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영등포전통시장 앞을 지나다 길가 꽃가게에서 문득 내 눈에 들어온 식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주 작은 호리병난이었고, 이 식물을 '입양'하는 것으로 호리병난과의 동행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밑둥이 엄지손가락만 하고 키도 한 뼘 정도에 불과했다. 비좁은 단칸방에서 창틀에 놓고 키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호리병난은 우리집에 들어오면서 온갖 수난,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창틀에서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난 게 몇 번인지 셀 수 없을 정도다. 지금까지 4차례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는 이삿짐센터 직원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겨울이면 동사 직전으로 사경을 헤매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이런 고난을 다 몸으로 녹여내면서 지난 24년을 한결같이 우리 곁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키도 많이 컸다. 지금은 엉덩이 둘레 약 40㎝에 키는 150㎝ 정도다. 호리병난 중에서도 많이 커지지 않는 품종치고는 아주 많이 자란 셈이란다. 특별한 관리 비법도 없다.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에 한 번씩 물을 듬뿍 주고 3년 정도 만에 부엽토 쬐끔 얹어주는 정도였다. 그리고 밑둥이 커져서 화분에 꽉 차면 밑둥에 맞는 크기의 분으로 갈아주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제 스스로 24년을 산 것이나 마찬가지다.

핵가족화와 고령화의 진전에다 나홀로족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세태에 맞춰 가족이나 자식 또는 친구를 대신하거나 함께하는 반려동물 또는 반려식물이 인기다. 나도 요즘 거의 매일 퇴근 후에 이 호리병난과 교감을 한다. 때때로 가족의 대화 소재로 오르내린다. 정말로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 모두 반려인에게 카타르시스와 치유 그리고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가족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이 호리병난은 나와 우리 가족에게 반려식물, 더 나아가 반려가족인 셈이다.

다가오는 결혼기념일에는 이 호리병난에게 좋은 이름 하나 지어줘 진정하고 당당한 가족의 일원으로 맞이해야겠다.

poongnue@fnnews.com 정훈식 생활경제부장·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