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차장칼럼] 영장기각이 적폐라니

조상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12.20 16:42

수정 2017.12.20 22:11

[차장칼럼] 영장기각이 적폐라니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던 1789년 선포돼 전 세계 근대국가의 인권신장과 법치주의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프랑스 인권선언'은 우리 헌법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게 '무죄추정의 원칙'이다. 헌법 27조에 규정된 이 대원칙은 '피고인의 자백이 구속의 부당한 장기화에 의해 자의로 진술한 것이 아니라고 인정될 때는 유죄의 증거로 삼거나 이를 이유로 처벌할 수 없다'는 헌법 12조 7항에서 보다 구체화된다. 하지만 최근 여론의 흐름은 이런 헌법적 가치와 정반대로 가는 분위기다. 구속영장을 기각한 판사의 이름이 각종 포털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 랭크되며 신상털기를 당하고 있는 현실은 과거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공교롭게도 비난의 대상이 된 영장전담 판사들은 문재인정부가 공약으로 내건 '적폐청산 수사' 피의자들의 심문을 맡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판사에 대한 마녀사냥식 여론이 형성된 데는 집권여당 국회의원들의 공개적 비난도 한몫했다. 이명박정부 시절 국군 사이버사령부의 여론조작 의혹을 받고 있는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68)과 임관빈 전 국방부 정책실장(64)을 구속적부심을 통해 석방한 것을 놓고는 도를 넘는 인신공격성 발언도 나오면서 사법부 공세에 여론이 동참해줄 것을 마치 호소라도 하는 분위기다. 더불어민주당의 안민석 의원은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김관진을 도주 우려가 없다고 석방한 판사, 정유라를 영장 기각시킨 적폐 판사들을 향해 국민과 떼창으로 욕하고 싶다"고 썼다. 같은 당 박범계 의원도 "법리가 아니라 소수의 정치적 공세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신중한 심리로 평가받던 판사가 이런 성급하고도 독단적인 결정을 한 것은 이유가 있다"며 음모론에 불을 지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행태가 사법부의 독립에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이다. 입법·행정·사법의 분리를 제안한 법률가이자 사상가인 몽테스키외의 영향으로 프랑스 혁명 이후 사법부 독립이 이뤄진 18세기 프랑스와 현재의 대한민국은 닮은 구석이 있다. 현 정부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따른 집권을 '촛불혁명'이라고 지칭하며 사법부 독립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법기관, 그것도 여당 의원이 전 정권의 비리 의혹을 받는 인물들의 영장이 기각된다고 해서 판사의 실명을 공개하고 신상정보를 언급하며 특정 성향으로 몰아가는 것은 정치권력의 부당한 간섭이자 사법 독립에 역행하는 처사다. 사법부는 국민이 선출하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된 유일한 권력기관이라는 점에서 국민의 신뢰는 사법 독립에서 가장 중요하다.
정치인들이 일부 여론을 등에 업고 판사를 향해 저급하고 원색적인 표현을 하거나 근거 없는 비난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적폐'가 아닌지 되묻고 싶다.

조상희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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