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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익의 재팬톡!]‘잔업 없애라’는 日노동정책의 그림자 ‘지타하라’

전선익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7.12.28 13:00

수정 2017.12.28 13:00

-일본 일하는 방식을 개혁한다.①
-'잔업No' 스트레스로 자살까지...심화되는 '지타하라'
-日 일하는 방식 개혁이 낳은 부작용 '지타하라'
-日 정부, 시간외 근무 100시간 이상일 경우 의사 면담 권장
-日 직장인 40% '지타하라' 경험
-시간외 작업 시간 韓 〉 日...미리 준비해야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도쿄=전선익 특파원】“나를 죽인 것은 회사.” 지난 2016년 12월 ‘지타하라(ジタハラ, 노동시간 단축 괴롭힘)’로 우울증에 빠진 남성(당시 만 48세)이 자살하기 전에 가족에게 남긴 메시지입니다. 그는 3명의 아이를 둔 아버지였습니다. 세일즈맨으로 20년 이상 경력을 가진 그가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을까요?
그의 아내는 마이니치신문과 인터뷰에서 “신규매장인 ‘혼다 자동차 지바’의 판매 지점장으로 발령 받은 뒤 ‘지타하라’가 시작됐다”며 “잔업 시키지 말라는 상부의 지시와 잔업 없이는 일을 처리할 수 없다는 직원들 사이에서 남편이 많이 괴로워했다”고 말했습니다.

중간 관리직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그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하려했고 결국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선택한 것입니다. 지바 근로기준 감독서는 그가 장시간 노동을 강요당했다는 이유로 그의 죽음을 산재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혼다자동차 측은 산재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지바 지방 법원에 항소해 현재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왼쪽부터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한국 등의 초과 근무 시간 현황. 일본과 미국, 한국이 유럽 국가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초과 근무시간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일본 후생노동성
왼쪽부터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한국 등의 초과 근무 시간 현황. 일본과 미국, 한국이 유럽 국가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초과 근무시간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일본 후생노동성
‘지타하라’란 회사가 노동시간 단축을 강요하는 괴롭힘을 뜻하는 말입니다. 일본 사회에 지난해부터 새롭게 번지는 유행어로 아베 내각의 ‘일하는 방식 개혁’과 함께 등장했습니다.

‘일하는 방식 개혁’이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기업의 근무 형태와 개념을 바꾸기 위해 도입한 정책입니다. 아베 총리는 정책 도입 당시 “(회사를 위해 희생하는)맹렬 사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부정되는 일본을 만들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장시간 노동으로 과로사가 끊이지 않고 저출산·고령화로 노동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해결 방법이었습니다.

사실 일본 사회는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과로사에 골머리를 앓아왔습니다. ‘Karoushi(과로사)’라는 단어가 일본 영어 사전에 실릴 정도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본의 노동시간은 EU국가들에 비해 월등히 많습니다. ‘맹렬사원’, ‘열혈사원’이라는 단어들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시대를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사진=Shutterstock
/사진=Shutterstock
그런데 아베 총리의 의미 있는 정책이 생각지 못한 암초를 만났습니다. 바로 ‘지타하라’입니다.

정부가 일하는 방식 개혁을 요구하자 미처 준비를 갖추지 못한 기업들은 업무량을 줄일 대안도 마련하지 못한채 무작정 직원들에게 잔업을 금지했습니다.

잔업까지 해도 빠듯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업무의 양을 공식 업무시간 안에 모두 처리하려니 결국 노동시간 단축이 직원들에게는 괴롭힘으로 여겨지는 '지타하라'로 작용한 것입니다.

지난 11월 일본 타카하시 서점이 직장인(20~60대 직장인 730명 조사)들에게 조사한 결과 약 40%의 직장인이 ‘지타하라’에 시달리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일본의 노동 안전 위생법에서는 시간외 노동이 ‘월 100시간’을 초과할 경우 노동자의 건강을 위해 의사 면담을 권장합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타하라가 심화되는 이유입니다.

꼼수를 부리는 기업도 등장했습니다. 27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부동산업체인 노무라 부동산은 일본 정부가 특별 직업군(기자, 증권분석가, 변호사, 공인회계사 등)에게만 허용하는 재량노동제를 편법으로 도입해 직원들을 장시간 근무토록 하고 있었습니다.

재량노동제란 쉽게 말해 노동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노동의 질과 성과에 의해 평가를 실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자, 변호사 같은 ‘전문업무형 재량노동제’와 기업의 중추 부서에서 기획 등을 담당하는 직원들을 위한 ‘기획업무형 재량노동제’가 있습니다. 노무라 부동산은 이 제도를 악용해 재량노동제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세일즈맨들에게 시간외 근무를 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올해 직장인 애환 담은 신조어…퇴준생·넵병·야근각 /사진=연합뉴스
올해 직장인 애환 담은 신조어…퇴준생·넵병·야근각 /사진=연합뉴스
일본 정부가 바라던 그림은 기업이 (AI·로봇 등)투자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거나 고용을 늘려 업무량을 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업의 투자를 강요할 수 없는 상황이니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정책이 진행되고 있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일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한국입니다. 심각하다는 일본도 앞지를 정도로 장시간 노동이 보편화 돼 있는 한국이 최근 정책적으로 휴일, 휴가 늘리기에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휴일은 늘었어도 업무량은 줄지 않았고, 고용도 늘지 않았으니 한국판 '지타하라'를 걱정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최저임금이 급상승하면서 당장 있던 직원의 인건비도 고민해야 하는 현실이니 직원들의 휴가를 위해 추가 고용을 생각할 엄두가 안 나는 것이지요.

요즘 젊은이들은 회사 업무와 자신의 생활을 균형있게 꾸려가고 싶어합니다. 휴가도 꼬박꼬박 챙기고 휴일에는 회사 일을 잊고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즐기고 싶어합니다.


젊은이들이 휴가를 여유있게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휴가 동안 업무가 밀리지 않도록 기업과 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근본적인 대안을 찾아줘야 할 것입니다. sijeon@fnnews.com 전선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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