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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유럽의 느슨한 결혼제도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1.08 17:05

수정 2018.01.08 17:05

[fn논단] 유럽의 느슨한 결혼제도

우리나라에서는 '선결혼 후자녀'라는 사고방식이 골수에 박혀 있어서 결혼 안 하고 아이 갖는 일은 생각조차 안 하려는 경향이 있다. 오죽하면 혼외자녀가 전체의 2.1%에 불과하겠는가. 그러나 주요 선진국들의 혼외출산율은 2015년 현재 39.5%로 세 명 중 한 명 이상이 혼외자녀이고, 이 비율도 계속 오르고 있다. 특히 출산율 걱정을 거의 안 하는 나라들일수록 혼외자녀 비율은 높아서 스웨덴과 프랑스는 거의 60%에 육박한다.

유럽 각국에서 혼외자녀 비율이 법률혼 자녀 비율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높아진 데도 국가정책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즉 법률혼 밖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차별 없이 국가의 복지 혜택을 적용한 결과다. 형편이 이러하니 우리나라도 이제는 혼외자녀에 대한 편견을 떨쳐버리고 '이 땅에 태어난 아이는 누구라도 동등한 출발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는 차원으로 접근해 동거부부 자녀에게도 법률혼 가족에 준하는 세제혜택 및 가족지원 그리고 의료보험 등을 적용하게 하고, 특히 배우자 없이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나 싱글파더들을 위해서는 추가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프랑스가 일찍이 1999년에 도입한 '사회연대협약(pacs)'이란 이름의 느슨한 결혼제도가 우리의 흥미를 끈다. 우리말로는 '등록동거혼' 정도로 번역되는 이 결혼은 이혼이 어렵지 않다는 것뿐 평소에는 통상적 결혼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결혼제도다. 세계적으로 어느 나라에서나 결혼관계의 속박은 상당하다. 쌍방의 합의가 없으면 재판을 통해서야 갈라설 수 있지만 그 대신 상속과 연금 혜택 등에서 법률의 보호를 받는다. 그에 반해 팍스는 배우자 일방의 신고만 있어도 자동으로 해제되는 낮은 속박성을 지녔으니 조금 느슨한 결혼제도이자 가벼운 결혼인 셈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는 청년실업난과 높은 주택가격 때문에 결혼하기가 용이하지 않은 사회가 돼버렸다. 가족가치가 높고 가족관계에 대한 기대도 커 결혼으로 인한 가족관계 유지의 부담도 높은 편이다. 이 같은 이유들로 당분간은 만혼 추세를 바꿔놓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그러니 팍스처럼 결혼을 좀 쉽고 가볍게 접근하게 해줄 방안이라도 적극 검토했으면 하는 것이다. 아주 안 하는 것보다야 가벼운 마음으로라도 결혼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말이다. 우리보다 먼저 이 제도를 시행한 프랑스는 팍스를 깨는 부부의 3분의 1은 강한 속박의 일반적 결혼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라고 하니 이 제도가 당초 우려한 것처럼 가족관계를 약화시키는 작용만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물론 결혼에 대한 통념이 워낙 강고해 새로운 제도 도입이 녹록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졸혼(卒婚)이라고 하여 결혼 해체 과정도 이제는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가 아니라 별거와 동거의 중간 어디쯤에 창의적으로 위치시키는 부부들이 늘고 있는 모양이다. 개인의 자기 주도성이 날로 중요해지는 현대사회에서 결혼관계 해소나 진입 과정이 다원화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가족제도와 가족지원을 패키지로 묶어 일대 개혁을 이끌어냄으로써 결혼도 각자 개성 있게 디자인하는 사회를 앞당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재인 전 한국보육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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