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이 즐기는 '문화콘텐츠' vs. 질병 일으키는 '중독물질'

셧다운제 시행 5년째… 사그라들지 않는 실효성 논란
게임포비아, 셧다운제 이어 WHO 질병분류 움직임 촉발
세계적 정신의학 전문가들 "중독으로 규명하기 어려워"
"문제 원인은 찾지 않고 손쉬운 규제로 해결" 지적도



'청소년 보호'를 이유로 심야시간 게임 접속을 차단한 '셧다운제'가 시행된지 5년이 지났지만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여전하다. 오히려 게임을 중독을 일으키는 중독물질로 분류하려는 움직임 마저 가시화되고 있다.

시간이 흘러도 게임을 두려워하는 '게임포비아' 현상이 개선되지 않으면서 업계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과도하게 사행심을 조장하는 아이템 등을 판매하는 수익모델에만 집중하고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에는 귀를 닫은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20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세계보건기구(WHO)는 오는 5월 열리는 '국제질병분류기호 개정(ICD-11)'에서 '게임 장애(gaming disorder)'를 질병으로 등재하는 방향을 검토하고 있다. 게임 장애가 질병으로 등재되면 전세계 20억명이 일상적으로 즐기는 문화콘텐츠인 게임이 질병을 일으키는 물질로 낙인 찍히게 된다.

■"게임 중독물질" 업계 반발

국내외 게임 관련 협단체와 전문가들은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다. 한국게임산업협회는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한국모바일게임협회, 한국게임개발자협회, 한국어뮤즈먼트산업협회, 한국인터넷PC문화협회, 문화연대, 게임개발자연대 등과 공동으로 성명을 내고 WHO 개정 철회를 촉구했다. 옥스포드대학교, 존스홉킨스대학교, 스톡홀름대학교, 시드니대학교 등의 세계적인 정신 건강 전문가와 사회 과학자, 각국 연구 센터 및 대학 교수진 36명은 WHO의 행보에 반대한다는 논문도 발표했다.

한덕현 중앙대학교 정신의학과 교수는 "정신의학 분야에서 가장 권위있는 '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 편람 5판(DSM-5)'에서도 게임중독에 대해 명확히 규정하지 못하고 있다"며 "내성과 금단증상 등이 수반돼야 중독으로 인정할 수 있는데, 게임의 경우 이 부분이 규명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업계 한 관계자는 "게임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게임이 누구나 즐기는 문화콘텐츠로 자리잡아 범죄자도 게임을 즐겼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며 "어떤 문제에 대한 원인을 찾고, 거기에 대한 제재라는 손쉬운 해법을 찾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게임포비아가 수년째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셧다운제 5년째 실효성 논란

사실 게임에 '나쁜 것'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불과 5~6년 전에 시행된 '셧다운제' 역시 게임을 부정적으로 보는 '게임포비아'에서 시작됐다. 학생들이 밤에 게임을 해서 잠을 자지 않기 때문에 청소년들의 수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로 시행된 법이다. 당시에도 업계에선 "게임 아니더라도 유튜브 등 동영상 시청, 메신저 대화 등 할 것은 많다", "부모가 게임 이용을 지도해야 하는데 업계에 떠넘기는 것", "이미 게임 등급제도에 따라 청소년이 할 수 없는 게임이 정해져 있는데 셧다운제는 중복 규제" 등 다양한 지적이 쏟아졌다. 지금도 계속 셧다운제의 실효성에 대한 지적이 끊이질 않고 있지만 정부는 "셧다운제가 필요하다"며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앞서 2006년에는 '바다이야기' 사태로 게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전국민에 심어졌다. 바다이야기로 인해 게임산업 전체가 도박을 권장하는 산업으로 매도됐다. 업계 한 관계자는 "바다이야기 사태로 게임이 사행심을 조장한다는 낙인이 찍혔고, 셧다운제로 게임은 청소년들이 하면 안되는 것이란 두 번째 낙인이 찍혔다"며 "이번 게임의 질병등재까지 이어지면 게임은 성인도 하면 안되는 마약과 같은 것이라는 세 번째 낙인이 찍히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게임 업계 자성 목소리도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관련업계의 책임도 크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게임업체들이 청소년 보호는 뒷전으로 미루고 수익만 쫓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2010년 이후 대부분의 게임에 도입된 우연적 요소에 의해 고급 아이템을 확보할 수 있는 이른바 '확률형아이템'이 과도하게 사행심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수차례 '확률형아이템'에 대한 지적이 나왔지만 업계에선 자율적으로 규제하겠다며 형식적인 가이드라인만 제시하는 등 사실상 '뒷짐'만 지고 있었던데 사실이다.

시민단체 등 전문가들이 최소한 청소년들에게는 확률형아이템을 팔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여전히 게임업체들은 청소년들에게도 이같은 아이템을 판매하고 있다. 자율규제 조차 지키지 않는 업체들도 있다.
코스닥 상장사인 선데이토즈와 데브시스터즈 조차 자율규제를 지키지 않은 업체로 지목됐다. 과거 셧다운제 도입 당시 게임업체들의 주장을 지지하며 정부의 과도한 규제를 탓하던 게이머들도 확률형아이템에 대해선 '반드시 규제해야 한다'는 쪽으로 돌아선지 오래다.

한 게이머는 "셧다운제, 게임중독 질병화 등에 반발하고 있는 게임업체들이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선 그에 걸맞는 책임도 져야 한다"며 "확률형 아이템만이라도 청소년에게는 팔지 않도록 하자는 주장에 귀를 닫으면서 게임은 중독이 아니고 청소년들에게 피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라고 지적했다.

jjoony@fnnews.com 허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