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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우의 두 영화] 그들은 왜 직접 나서야만 했나.. <쓰리 빌보드> vs. <프리즈너스>

신민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4.12 11:10

수정 2018.04.12 11:10

[신민우의 두 영화] 그들은 왜 직접 나서야만 했나..  vs.

<쓰리 빌보드>의 밀드레드는 7개월 전 살해당한 딸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범인은 오리무중. 경찰은 수사에 난색을 표한다. 결국 그녀는 광고판에 경찰을 비난하는 문구를 싣는다. “내 딸이 죽었다. 아직도 범인을 못 잡았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고.

경찰들은 광고를 내리라고 압박한다. 몇몇을 제외한 마을 사람들도 그녀에게 반감을 보인다.
그녀는 죄책감, 공포, 분노를 느끼면서도 홀로 외로운 싸움에 나선다.

<프리즈너스>의 켈러는 딸이 유괴되자 경찰을 닦달한다. 하지만 유력 용의자인 알렉스는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다. 실종기간이 길어지자 그는 직접 딸을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는다. 결국 알렉스를 납치, 딸의 행방을 알아내려 한다.

쓰리 빌보드와 프리즈너스 두 영화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절박함을 극단적으로 표현한다. 밀드레드는 딸 살해범을 찾기 위해 경찰을 공개 비난하고 경찰서까지 테러한다. 켈러 역시 알렉스를 납치해 구타, 고문을 자행한다.

특히 켈러는 알렉스를 고문하면서도 딸의 사진을 통해 죄책감을 씻고 신에게 용서를 구한다. 신앙의 역설이다.

■ 그들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켈러(오른쪽)는 딸을 유괴한 범인으로 알렉스를 지목한다. 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그가 풀려나게 되자 로키와 다른 방법으로 딸을 찾으려 한다. 알렉스를 납치해 고문해 그 행방을 묻는 것. 경찰에 대한 불신은 <프리즈너스>와 <쓰리빌보드>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켈러(오른쪽)는 딸을 유괴한 범인으로 알렉스를 지목한다. 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그가 풀려나게 되자 로키와 다른 방법으로 딸을 찾으려 한다. 알렉스를 납치해 고문해 그 행방을 묻는 것. 경찰에 대한 불신은 <프리즈너스> 와 <쓰리빌보드> 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주인공들은 줄곧 경찰과 갈등을 일으킨다. 밀드레드는 경찰서장 윌러비에게 “모든 남자들의 혈액을 채취해서라도 범인을 찾으라”고 요구한다. 켈러 역시 “알렉스는 범인이 아니다”라는 경찰의 말을 믿지 못하고 납치·학대를 저지른다.

이런 행동들의 저변엔 불신이 깔려 있다. 공권력만으론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는 마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리즈너스>는 <쓰리 빌보드>의 프리퀄처럼 느껴진다.

<프리즈너스> 속 알렉스는 유괴사건의 핵심인물로 지목된다. 관객들은 그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는 모습에 답답할 수밖에 없다. 켈러도 이에 반발한다. <쓰리 빌보드>에서 그려지지 않은 ‘사건 후 7개월’을 보는 듯하다. 피해가족이 사건 해결을 요구하지만 경찰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만 반복하는 모습이 그렇다.

이 불신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를 흐려놓는다. 두 주인공 모두 선한 피해자로만 볼 수 없다. 지적 장애인인 알렉스는 켈러에게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밀드레드는 경찰서를 테러한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 딕슨이 중증화상을 입는다.

■주인공과 대척점에 선 인물들

딕슨(왼쪽)은 경찰서 내에서도 문제아로 꼽힌다. 백인·남성·경찰 등 기득권에 속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밀드레드와 마찰을 일으키다가 사망한 경찰서장 윌러비의 조언을 받아 개심해 영화 후반부를 이끌어나간다.
딕슨(왼쪽)은 경찰서 내에서도 문제아로 꼽힌다. 백인·남성·경찰 등 기득권에 속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밀드레드와 마찰을 일으키다가 사망한 경찰서장 윌러비의 조언을 받아 개심해 영화 후반부를 이끌어나간다.

딕슨은 밀드레드의 대척점에 서 있다. 히스패닉, 흑인 등과 친밀한 밀드레드와 달리 그는 백인·남성·경찰 등 기득권에 속했다. 밀드레드가 광고를 해지하도록 친구들을 괴롭히고 광고담당자를 구타하기도 한다.

하지만 딕슨은 췌장암에 걸린 윌러비의 조언을 받아 개심하면서 영화 후반부를 이끌어나간다. 이 변화를 상징하는 게 바로 경찰배지다.

‘사고뭉치’ 딕슨은 윌러비 사후 부임한 신임 서장으로부터 “배지를 내놓으라”는 말로 해고통보를 받는다. 하지만 배지를 잃어버려 반납조차 할 수 없다.

이후 딕슨은 술집에서 유력한 범죄용의자를 만난다. 일부러 그의 피부를 긁어 유전자 감식 표본을 확보하지만 피투성이가 될 만큼 얻어맞는다. 집으로 돌아온 딕슨이 어머니의 절규 속에서도 표본을 유리관에 담는 모습은 그가 비로소 경찰에 가까워졌다는 걸 의미한다.

<프리즈너스> 유괴사건의 담당 형사 로키와는 사뭇 상반된 모습이다. 로키는 소년원 출신으로 영화상으론 이미 선을 추구한다. 반면 딕슨은 구타, 인종차별, 협박 등을 일삼는 문제 경찰에서 밀드레드의 조력자로 바뀌는 입체적 인물로 그려진다. “초반에 밀드레드를 응원하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딕슨에 주목하게 된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밀드레드는 딸이 살해당한 뒤 7개월이 지나도록 범인이 체포되지 않자 공개적으로 경찰을 비난한다. 피해가족이라고는 하지만 그 역시 경찰서를 테러하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쓰리 빌보드>는 선악 사이에서 갈등하는 피해자를 표현하기보다 분노로부터의 해방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밀드레드는 딸이 살해당한 뒤 7개월이 지나도록 범인이 체포되지 않자 공개적으로 경찰을 비난한다. 피해가족이라고는 하지만 그 역시 경찰서를 테러하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쓰리 빌보드> 는 선악 사이에서 갈등하는 피해자를 표현하기보다 분노로부터의 해방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이후 딕슨은 신임 서장의 복귀 제안을 거절한다. 뒤늦게 찾은 경찰 배지도 그제야 내놓는다. 하지만 용의자는 범인이 아니며 과거 유사범죄를 일으킨 사람으로 추측될 뿐이다. 딕슨은 밀드레드에게 이 소식을 전하며 “희망을 잃지 말라”고 격려한다.

■ 실패한 복수, 그리고 조금은 다른 결말
<쓰리 빌보드>는 두 사람이 범죄자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막을 내린다. 밀드레드가 “경찰서에 불을 지른 사람이 나다”고 고백하자 딕슨은 대수롭지 않게 “당연한 걸 왜 말하고 있느냐”고 되묻는다. 그제야 밀드레드는 미소를 짓는다. 분노와 용서를 함축한 대화다.

밀드레드는 “범죄자를 죽일지 살릴지는 가면서 생각하자”는 말로 복수심에서 벗어난다. 딸이 살해당했을 때 느낀 무기력과 죄책감을 간접적으로 해소했기 때문이다. 범죄로 인한 굴레를 범죄를 통해 구원 받는 점이 아이러니다.

알렉스(오른쪽) 역시 자신이 고모로 부르는 여인에게 납치당한 피해자다. 이 여인은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켈러를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는다. 로키의 활약으로 사살되기 전까지 악행을 저지르는데, 그 이유는 '신과의 전쟁'이다. 과거 기독교 신자였던 그녀는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중병으로 죽자 다른 사람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이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 켈러 역시 그 피해자 중 하나였던 것.
알렉스(오른쪽) 역시 자신이 고모로 부르는 여인에게 납치당한 피해자다. 이 여인은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켈러를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는다. 로키의 활약으로 사살되기 전까지 악행을 저지르는데, 그 이유는 '신과의 전쟁'이다. 과거 기독교 신자였던 그녀는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중병으로 죽자 다른 사람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이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 켈러 역시 그 피해자 중 하나였던 것.

반면 <프리즈너스>의 켈러는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로키를 믿지 못한 그는 알렉스의 집을 찾아가 진실을 알게 된다. 알렉스 역시 어릴 적 납치를 당했고, 범인은 알렉스의 고모 행세를 하고 있던 것. 켈러는 그의 강요로 구덩이 속에 들어가게 된다. 마치 죄인이 악마에 이끌려 지옥에 들어가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결국 켈러는 딸을 구출한 로키가 들을 때까지, 구덩이에 있던 호루라기를 쉴 새 없이 불어야 하는 운명에 놓인다.

밀드레드와 켈러는 딸의 살해, 실종으로 인해 선과 악을 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장르적인 쾌감이 보단 여운을 준다. 두 주인공 모두 통쾌한 복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 밀드레드는 끝내 분노를 해소하지만 살해범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켈러는 구덩이 속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두 영화 모두 권선징악이란 전형적 엔딩보다 피해와 가해, 복수와 용서, 분노와 구원이 뒤엉킨 모습이다. 다만 <쓰리 빌보드>는 선악 사이에서 갈등하는 피해자보다 '해방'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프리즈너스>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제목이다. ‘갇힌 사람들’이란 의미다.
기독교 신자인 켈러는 악의 구렁텅이로 스스로를 밀어 넣었다. 어쩌면 이 제목은 켈러뿐 아니라 밀드레드에게도 해당되는 단어일지 모른다.
그녀는 딕슨과 함께 복수의 여정을 떠나기 전까지 딸에 대한 죄책감, 분노에 갇혀 있었으니 말이다.

smw@fnnews.com 신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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