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건·사고

[단독]"이름, 주민번호 바꾸면 뭐해"..친족성폭력 2차 피해 '노출'

최용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4.18 14:20

수정 2018.04.18 14:29

-[친족성폭력 OUT](6.끝)
-친족성폭력 가해자, 피해자 변경된 주민번호 확인 가능 
-가족관계등록법상 가해자 열람제한 조항 없어 
-대법원 “시스템 개선 올 연말에나 가능”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교도소에 수감된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고 떨렸다. A씨(여·25)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12년간 친부에게 성폭력 당했다. 그는 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싶었다. 교도소 접견실에서 A씨는 친부에게 “날 찾지 마”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아랑곳 않고 “너 00동으로 이사갔다며?”라고 되물었다. A씨는 크게 놀랐다.
그는 “아버지가 최근 이사한 장소를 정확히 알아 출소 후에도 찾아올 것 같다”고 걱정했다.

최근 A씨는 친부가 자신의 주민등록등본을 볼 수 없도록 제한했다. 이름과 주민번호도 바꿀 계획이지만 임시방편이다. 가해자 친부가 등본을 떼는 대신 가족관계증명서를 요청하면 딸 A씨의 바뀐 이름과 주민번호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A씨는 “가족관계증명서에 대한 열람제한이 없다는 것은 결국 아버지 손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말”이라고 전했다.

■피해자 새 주민번호 노출될까 전전긍긍
친족성폭력 피해자들이 재폭력 우려로 이름과 주민번호를 바꾸지만 행정 시스템 문제로 신상정보가 가해자에게 고스란히 노출 위기에 놓였다.

18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주민등록번호 변경제도가 처음 시행된 지난해 6월부터 이달 13일까지 가정폭력(친족성폭력 포함) 피해자 주민번호 변경 신청은 111건, 이중 82건이 인용됐다. 피해자를 가해자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것으로, 피해자 중에는 단절을 위해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흔하다.

문제는 피해자들이 이름과 주민번호를 변경한 후 주민등록등본 열람을 제한해도 가해자가 가족관계증명서를 떼면 피해자 이름과 주민번호가 노출된다는 점이다. 주민등록법에 따라 가정폭력 피해자는 이름, 거주지, 주민번호 등이 공개되는 주민등록등·초본 열람제한을 신청할 수 있지만 가족관계등록법 적용을 받는 가족관계증명서는 열람을 제한할 근거가 없어 본인 또는 배우자, 부모, 자녀는 누구든 뗄 수 있다.

A씨는 가족관계증명서로 인한 신원노출로 2차 피해를 당하는 사례가 많아 열람 제한을 위한 대국민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국회와 정부에 몇 번씩 찾아가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했지만 각 기관도 어떻게 바꿔야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며 “피해자들이 언제든 2차 피해를 당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주민번호 변경제도를 주관하는 행안부는 제도 시행 전부터 이런 허점을 파악했다. 행안부 관계자는 “현행법상 주민등록등본은 열람제한을 두고 있지만 가족관계증명서는 열람을 제한할 근거가 마련돼 있지 않다”며 “주민등록 변경제도 시행 전인 지난해 1월 가족관계등록법 소관 대법원에 공문을 보내 가족관계증명서 열람 제한을 검토해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고 전했다.

대법원은 행정시스템을 바꿀 예산이 없다며 사실상 1년째 방치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가족관계증명서 열람을 막기 위한 전산시스템 개선에 3억원이 든다”며 “지난해 문제를 알았지만 예산확보가 어려웠고 올 11월께 시스템 완성을 위해 서두르는 중”이라고 해명했다.

주민등록등초본과 가족관계증명서 차이
열람제한 가능여부 관련법령 공개범위 주무부처
주민등록등촌본 가능(주민등록법 29조) 주민등록법 이름, 주민번호, 현주소 행정안전부
가족관계증명서 불가능(법적 근거 없음) 가족관계등록법 이름, 주민번호, 등록기준지(본인 또는 배우자, 부모, 자녀는 모두 열람가능) 대법원
(행정안전부, 대법원)

■주민번호로 주거지 찾기 쉬워, 의원 “법 개정 필요”
전문가들은 친족성폭력 2차 피해를 막으려면 피해자 신상정보 관리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가해자가 이름과 주민번호를 알면 단절을 원하는 피해자와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최근 스토킹범죄가 SNS를 활용해 이뤄지고 주민번호와 이름만 알면 피해자 주거지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혜영 서울해바라기센터 부소장은 “가해자가 교도소에 수감된 후라도 피해자는 자신을 찾을까 두려움에 휩싸이고 실제 가해자가 출소 후 피해자를 찾는 사례가 많다”며 “피해자 신상정보가 가해자에게 노출된다는 것은 정신적 고통 뿐 아니라 재피해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현행 가족관계증명서상 주민등록번호 열람제한이 이뤄지지 않아 거주지 노출 등 위험한 상황”이라며 “친족성폭력 피해자 안전을 위해 가족관계등록법 법개정 추진이 조속히 필요하다”고 밝혔다.

<기사 순서>
[친족성폭력 OUT]
(1)"고통의 사슬 어떻게 끊어낼지"..친족성폭력 피해자 노유다 작가
(2)한해 친족성폭력 범죄 700건, 빙산의 일각
(3)47세 친족성폭력 피해자, “공소시효 지나 처벌 못하다니요”
(4)친족성폭력 피해자는 길거리로, 가해자는 가족품
(5)장애인 성폭력 피해, 2년짜리 보호시설 10년 방치
(6. 끝)"이름, 주민번호 바꾸면 뭐해"..친족성폭력 2차 피해 '노출'
junjun@fnnews.com 최용준 김규태 기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