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칼럼]

'설마'의 수레바퀴

지령 5000호 이벤트
우리말 중에 '설마'라는 단어가 있다. 생길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나,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쓰이는 부사다. 주로 부정적인 추측 앞에 붙여서 '그럴 리가 없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생각보다 쓰임새가 많다. 문장 앞에 쓰거나, 아니면 그냥 단어 그 자체만 쓸 때도, 많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묘미가 있다. 가령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라고 써놓고 보면 앞뒤 내용이 없더라도 일단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얼마 전 사퇴한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은 '설마' 속의 인물이었다.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여의도 기관장 자리 몇 개가 공석이 됐는데, 그때 "설마 그분이 오는 것은 아니겠지"라는 농담이 금융투자업계에서 돌았다.

그분이 바로 김 전 원장이었다. 청와대가 주도하는 인사의 방향성이 재벌개혁을 정조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분위기에서는 그럴싸한 가설이었다. 설마는 가끔 사람을 잡기도 하는데, 농담처럼 여의도를 떠돌던 그 말은 결국 사실이 됐다.

삼성증권의 배당주 사고도 처음 들었을 때는 '설마 그런 일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사고 자체도 워낙 황당한 내용이었지만, 소비자들이 막연하게 가지던 삼성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신뢰도가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수년 전 삼성그룹 관계자와 사석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당시는 금융사들이 고객정보 유출 등의 사고 때문에 곤욕을 치르던 때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금융계열사들에 돈 벌어 오라는 소리 안 한다. 돈은 우리가 벌면 되니, 그냥 사고만 안 치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삼성 제조업 계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그의 말은 결국 틀리지 않았던 셈이다. 설마 했던 사고가 금융계열사에서 터졌으니 말이다.

정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댓글조작 '드루킹' 사건도 그야말로 설마 했던 일이 사실로 드러난 격이다. 누군가 댓글로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 부르짖던 진영에서 타격점을 심각하게 잘못 잡았다는 점은 비극이지만 말이다.

요즘에 여의도에서 새로 뜨고 있는 '설마'가 있다. 김 전 원장의 사임으로 금감원장 자리가 비었는데, 여기에 민간 출신 인사 한 명이 후임으로 거론된다. 그는 증권사 두어 군데에서 사장을 지냈는데, 마지막 직장을 심각한 경영난에 빠뜨려 놓고 정계에 입문했다. 별다른 성과가 없는 듯싶더니 어느 날 TV 청문회에서 재벌들을 가차 없이 비판한 덕분에 갑자기 스타가 됐다.

증권가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독특한 성격과 과감한 정리해고, 역대급 경영실책이라는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과거였다면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웃어넘길 수도 있겠지만 요즘은 다르다. 세월이 하수상하다 보니 과연 어찌 될지는 두고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설마 했던 일들이 수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다음엔 어떤 황당한 사건들을 꺼내 놓을지 모를 일이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증권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