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건·사고

허리 다쳤다며 밭일시키는 주민도.. 경비원이 머슴인가요?

김유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5.24 18:00

수정 2018.05.24 20:50

[fn스포트라이트 일상 속 갑질] (3) 아파트 경비원은 동네북
택배수령·분리수거는 양반 이삿짐 나르고 청소시키고 경비업무 아닌데도 "해라"
층간 흡연 항의 들어오면 위·아랫집 주민에게 뭇매.. 사실상 주민들이 ‘사장님’
부당한 요구 들어줄수밖에
서울의 한 아파트 경비실로 경비원들은 24시간 내내 이곳에서 휴식도 하고, 밥도 먹는다.
서울의 한 아파트 경비실로 경비원들은 24시간 내내 이곳에서 휴식도 하고, 밥도 먹는다.


"천박한 놈이라면서 막 굴려도 거역을 못하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참아야 해요."

돌이켜보면 치욕스러워서 살이 떨린다. 20개월간 전라도의 한 아파트 경비원으로 근무한 윤모씨(61)는 입주자대표회의 간부에게 폭언을 듣고, 뒤치다꺼리해주다 그의 요구를 한 차례 거부했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윤씨는 자신이 입주민의 농사일까지 떠맡은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쓴웃음을 짓는다. 그에 따르면 지난 2017년 9월 대표회의 부회장은 "허리를 다쳤으니 일을 도와달라"며 윤씨를 불렀다.
자칫 토를 달았다가는 해고로 직결될 수 있던 터라 응할 수밖에 없었다. 윤씨는 "근무시간에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밭에 가서 배추, 열무를 심고 밭을 가꾸느라 4시간 내내 허리를 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상식 밖의 지시는 계속됐다. 부회장은 다른 날에는 골동품을 가져와 윤씨에게 "광이 나도록 갈고 닦으라"고 시켰다. 또 회장은 폭언을 자주 했다. 전직 교장인 회장은 교육자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경비들에게 "X놈" "이XX" 등 천박하다는 투로 욕설을 마구 내뱉었다. 윤씨는 올해 2월 회장을 모욕죄로 경찰에 고소했다. 윤씨는 "경비원은 현대판 머슴이다. 불만이 있어도 생계에 지장이 있을까 꿀 먹은 벙어리 신세"라고 한탄했다.

경비원들은 휴게시간에도 소등하지 못한 채 잠을 청해야한다.
경비원들은 휴게시간에도 소등하지 못한 채 잠을 청해야한다.


■경비실에서 불 켜고, 무전 대기한 게 휴식시간?

'동네 머슴'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게 다수 경비원들의 전언이다. 택배, 재활용, 청소, 조경, 이삿짐 나르기 등 경비업무 외 업무를 당연하듯 하고 주민들 요구에 따라 발레파킹(대리주차), 밭일, 집 청소까지 하고 있다. 현행법상 경비업무가 아닌 일을 경비원에게 시키는 건 명백한 불법이다. 주민이 경비원에게 업무지시를 할 근거는 없지만 현장에서 이 규정은 지켜지지 않는다.

지난해 12월에 한 아파트 주민들은 "무거운 짐이나 양손이 무겁게 들고 있는 상태에서 아파트 출입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게 힘들다"며 "경비실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입구 문을 열어달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경비원들은 센스가 없다"고 했다.

비슷한 시기 서울 압구정 구현대아파트에서는 주민들이 경비원에게 수년간 대리주차를 시켰다는 논란이 제기됐다. 서울노동권익센터가 2015년 12월 발표한 '아파트 노동자 지원방안 연구'에 따르면 경비원은 방범안전점검(38.6%)에 이어 택배관리(28.7%), 청소 (18.5%) 순으로 업무 비중이 많다고 느꼈다. 경비 업무 외 비중이 절반을 넘게 차지한 셈이다.

특히 고통스러운 건 휴식 시간과 장소가 딱히 없다는 점이다. 경비원들은 대게 24시간 격일제로 일해 대표적인 장시간 근로자로 꼽힌다. 이에 '공식 휴게시간'은 많지만 경비실에서 대기해야 하는 데다 주민들이 24시간 민원을 하는 탓에 쉴 시간이 없는 것이다. 매년 최저임금이 오를 때마다 임금 상승을 막기 위해 휴게를 늘리지만 서류상 휴식일 뿐이다.

서울에서 6년째 경비로 일하는 우모씨(63)는 밤마다 경비실에서 불을 켠 채 잠을 청하지만 결국 뜬눈으로 지새운다고 토로했다. 그는 "24시간 근무하고 다음 날은 쉬는 격일제 근무를 하는데 10시간이 휴식시간이다. 그중 실제 1시간도 쉬지 못한다"고 밝혔다. 우씨는 총 3시간인 점심·저녁 동안 경비실에서 밥을 먹으면 차 빼달라 요구하거나 택배 찾으러 오는 주민들로 정신이 없다. 밤 11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취침시간엔 불도 끄지 못하고 경비실 의자에 앉아 대기한다. 그는 "밤에도 무전이 울리고, 주민들은 현관문을 열어달라고 전화를 한다"고 했다.

■층간흡연 중재 나섰다가 "새우등 터져"

최근에는 경비원 부담이 더 늘었다. 공동주택관리법 개정으로 경비원들이 층간흡연 문제까지 개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법에 따라 경비원은 주민에게 흡연중단을 요구할 수 있고 해당 가구에 들어가 조사까지 가능하다. 그러나 대표적 '을'인 경비원이 주민 간 다툼에 끼어들었다가 새우등 터지는 꼴이 될 수 있어 볼멘소리가 나온다. 서울 노원구에서 경비일을 하는 박모씨(62)는 "최근 주민이 흡연 문제로 민원을 넣어서 해당 동에 찾아가 자제해달라고 했다가 '당신이 뭔데'하면서 삿대질을 당했다"며 "언제 주민에게 찍혀 해고될지 모르는데 아무 보호장치 없이 개입하라는 건 탁상행정"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각종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아파트 경비원은 대표적 '감시근로자'에 속한다. 법에서 감시근로자는 업무 강도가 낮다고 보고 고용부 장관 승인을 통해 임금(주휴수당, 가산수당 제외)이나 휴게에 차별을 두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임금을 적게 주기 위한 방편으로 감시근로자 제도가 악용된다. 고용부 감시·단속적 근로자 승인 건수는 2011년 6414건에서 2016년 1만263건으로 껑충 늘었다.
한국노총 이상혁 노무사는 "예전처럼 경비원들이 경비만 서지 않는데도 임금을 덜 주기 위한 방편으로 제도가 악용되는 경우가 있다"며 "고령의 경비원들이 고용불안 때문에 이런 문제를 제기하기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스포트라이트팀 박준형 팀장 구자윤 김규태 최용준 김유아 기자

integrity@fnnews.com 김규태 기자 integrity@fnnews.com 김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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