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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 시대정신

안삼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6.28 16:56

수정 2018.06.28 16:56

[여의나루] 시대정신

사람의 의지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어젯밤 우리 축구팀이 독일팀을 이긴 것과 같이. 한 국가의 경우에도 동시대를 사는 국민들 간에 형성된 집단적 의지가 큰 힘을 발휘한 예를 우리는 역사에서 보고 있고, 이를 교훈으로 받아들여 본받고자 노력한다. 여러 객관적 여건에서 열세였던 이스라엘이 중동전에서 승리한 데는 많은 요인 중에 단연 합심단합한 국민적 의지를 으뜸으로 쳐야 할 것이다. 때로는 한 명의 지도자가 토해내는 외침이 스러져가는 국민을 일깨워 상황을 바꿔놓는다. 윈스턴 처칠경이 외친 피, 눈물, 땀이 영국을 승리와 부흥으로 이끌어간 것이 그 예다.

시대정신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신자세나 태도이다.
앞서 들었던 예에서 본다면 전시라는 극한상황에서는 당연히 승리가, 전후에는 부흥·재건 같은 말이 넓게 공유될 것은 뻔한 이치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시대의 요구에 국민이라는 집단이 어느 정도의 결집력을 갖고 같은 정신을 널리 공유하느냐는 것이다. 거기에는 특히 정치지도자들의 비전과 철학이 큰 역할을 할 것은 자명하다.

우리에게도 강렬한 시대정신이 있었다. 광복 이후 혼란기를 지나 1960~1970년대로 대표되는 산업화 시대에 우리 국민이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공유했던 정신은 단연 '잘살아보세'였다고 생각한다. 그냥 잘살아봤으면 하고 꿈만 꾼 게 아니라 끈질긴 노력도 따랐다. '하면 된다' 그리고 심지어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말까지 신조처럼 지키고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고도성장을 이룩하면서 모두가 신이 났던 때였다. 결과를 중요시한 나머지 반칙도 있었지만 높은 성장률과 두꺼워지는 지갑 덕분에 이런 반칙들은 묻혀버리곤 했다.

1990년대 들어 경제가 성숙해지면서 성장률은 뚝뚝 떨어졌다. 요소투입의 효과가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었다. 특히 노동의 대가로 받는 임금이 올라갔다. 생산원가가 올라가서 회사의 경쟁력은 전만 못했지만 가계의 살림살이는 좋아졌다. 생활이 나아진 국민은 민주적 권리를 갈망했고, 우리는 '문민' '참여'와 같은 슬로건을 들었다.

이 시대에 우리 사회 전반을 풍미한 정신이 무엇이었을까. '민주화'와 '탈권위'였다고 생각된다. 이제 민주주의는 이 땅에 제도로서 정착됐다. 선거로 대통령이 바뀌고, 집권당이 바뀐다. 선거 또한 요란하게 실시된다. 온 도시의 네거리마다 현수막 천지가 된다. 그런데 당선된 대표들이 하는 대의정치는 요란했던 선거 과정과 비교해 본다면 영 신통하지가 않다. 우리가 쌓아올린 민주주의라는 집이 비가 오면 비가 새고, 바람이 불면 덜컹거리는 판잣집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튼튼하고 작동이 잘되는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이리라.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짧은 기간에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킨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자기 만족은 금물이다.
땅덩이가 크고 자원이 많아서 바깥세상에 무슨 일이 있어도 울타리 안만 돌아가도 먹고살 수 있는 사정이 아니다. 오히려 대외적 상황과 변수를 끊임없이 살피고, 그 관찰 위에 기회를 포착하고, 그 기회를 성과로 만들어내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이다.
'잘살아보세'와 '민주와 탈권위'를 이어, 같이 널리 공유하는 시대정신이 있어야 한다.

김종훈 전 외교부 통상교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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