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의료사고도 서러운데… 병원 과실 밝힐 감정인 못구해 '또 눈물'

이진석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8.07.09 17:20

수정 2018.07.09 17:20

동종업권·학연으로 얽혀 대부분 의사들 '감정' 꺼려
감정결과 받는데 6개월~1년.. 소송 장기화 이중고 시달려
의료사고도 서러운데… 병원 과실 밝힐 감정인 못구해 '또 눈물'

지난 2010년말 경영 컨설팅회사를 운영했던 50대 대표 A씨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생긴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대형 대학병원을 찾았으나 치료 과정에서의 사고로 정신지체를 앓게 됐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억울함을 풀고자 A씨 측은 병원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냈지만, 재판과정에서 이를 입증해줄 감정인을 찾지 못해 1심에서 극히 적은 손해배상액만 인정받았다. 2심에 돌입한 지 2년만에야 겨우 감정인을 찾은 끝에 병원 측의 의료과실이 입증됐고, A씨는 추가 손해배상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5년이 넘도록 소송이 이어진 탓에 A씨 가족이 입은 정신적 및 재산상 피해는 막심했다.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의료소송에서 감정인이 재판에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법원이 판단의 권한을 갖더라도 과실을 입증할 의학적 지식은 부족하기 때문에 의사에게 감정을 의뢰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의료사고 피해자들은 소송에서 필요한 감정인을 구하지 못해 판결에 불이익을 받거나 장시간 소송이 지연되는 고통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9일 한국의료분쟁조정원의 통계연보에 따르면 의료사고 손해배상 소송은 지난 2012년부터 2016년까지 5년간 총 4989건이 접수됐다. 이 가운데 손해배상액을 단 한 푼도 인정받지 못한 소취하·각하 또는 기각된 건수는 1612건(32%)에 이른다. 환자 측이 승소한 경우는 47건으로 1%를 밑돌며, 의료과실을 일부 인정받은 '원고 일부승'을 합치더라도 1432건으로 30%선을 넘지 못한다.

■감정결과 영향 절대적… 감정인 선정·회신에는 어려움

의료소송에서 관련 지식이 없는 환자 개인이 의료진의 과실을 입증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 때문에 의료소송에서는 법원이 일반병원의 감정의나 대한의사협회, 한국의료분쟁조정원 소속 전문의들에게 의뢰해 감정절차를 진행한다.

법원도 고도의 전문지식이 필요한 분쟁에서 전문가 의견에 중점을 둘 수 밖에 없어 사실상 감정결과가 재판의 결과를 실질적으로 좌우한다.

문제는 의료계 내 암묵적 카르텔이 감정인 선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다. 폐쇄적인 의료계의 성격상 같은 업권 내 의사들에게 불리한 감정을 내기란 부담감이 작용한다는 의견이다.

한 의료 전문 변호사는 "의료계 내에서 영향력이 있는 대형병원 측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는 의료계 내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어 일반병원 의사들이 감정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뇌의학 등 전문분야에서는 의사들 간에 서로 학회나 동문 등으로 연결돼 있는 경우가 많아 감정인 선정에 더 큰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감정인을 선정하더라도 감정결과의 회신이 6개월에서 길게는 1년 동안 장기간 지연되는 문제도 있다. 재판부로서도 감정결과가 올 때까지 하염없이 선고를 미룰 수 밖에 없다. 일반 민사소송이 1년 내 종결되는 것과 달리 의료소송이 2~3년 간 이어지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재판지연에 따른 피해는 환자 측이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조정중재원·대한의협의 도움이 있지만…"

조정중재원이나 대한의협의 도움을 받아 수탁감정을 진행하는 방법도 있으나 이들도 현직 의사들로 구성돼 있어 공정성과 중립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일례로 건설사와 조합 측이 맞붙는 건축 소송에서 감정인은 어느 당사자의 의뢰를 받더라도 이해관계 면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나 조정중재원이나 대한의협이 추천한 의사들은 현직 의사 신분이어서 의사들에 반대되는 감정결과를 내놓기 부담이 있다는 지적이다.

박호균 법률사무소 히포크라 변호사는 "일반병원에 의뢰한 감정과 달리 대한의협과 조정중재원의 감정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익명감정이기 때문에 책임감과 공정성이 떨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절차상 조정중재원에서 감정을 진행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도 있다.

의료소비자연대 관계자는 "의료소송 피해자들은 보통 조정중재원 결정에 불복할 경우 민사소송으로 넘어간다"며 "조정중재원의 감정결과에 이의가 있어 소송을 제기했는데, 법원이 감정을 다시 조정중재원에 보내는건 문제가 있다.
궁극적으로 조정중재원 법원을 컨트롤하게 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의료소송에서 환자들이 감정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호균 변호사는 "의료소송에서 감정인에게 감정촉탁을 하면 회신 기한을 설정하거나 지연될 시 사유를 소명하도록 하고, 감정을 공정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취지의 근거를 민사소송법에 추가하는 등 입법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fnljs@fnnews.com 이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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