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칼날 휘두르는 사우디, 뒷짐 진 美


"지금도 많은 사우디아라비아 지식인들과 언론인들이 감옥에 가고 있다. 어느 누구도 사우디 정부의 개혁에 대해 비판하거나 말할 수 없을 것이다."

1990년대 아프가니스탄에서 오사마 빈 라덴을 인터뷰해 유명세를 탔던 자말 카쇼기는 지난 3월 알자지라 방송에 출연, 사우디 정부를 맹비난했다. 사우디 왕실 고문까지 지냈던 그는 2010년 일하던 유력 일간지에서 쫓겨난 뒤 서방을 떠돌며 고국의 독재를 알렸다. 그리고 지난 2일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 영사관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터키 당국은 그가 살해당했다고 주장했으나 사우디 정부는 부인했다.

21세기에도 전근대적 절대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사우디의 정치적 악명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유명하지만 이번 사건은 특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같은 이슬람 국가이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인 터키 영토에서 암살극을 벌였다는 것은 사우디의 집착과 오만이 도를 넘었다는 의미다. 이런 행동의 배후에는 사우디의 실세,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의 '왕권 강화' 욕심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 국토안보부에 따르면 2010년 초반까지 연간 20명 아래에 머물던 사우디 출신 망명자는 빈 살만 왕세자가 국방장관에 취임해 사실상 정부를 장악한 2015년 이후 급증했다. 망명자 숫자는 이듬해 47명까지 치솟았다. 지난달 캐나다 언론에 따르면 사우디 유학생 가운데 최소 20명이 사우디 정부의 귀국 압박에 저항해 망명신청을 냈다. 익명의 중동국 고위 관계자는 이달 미국 정치전문지 포린폴리시를 통해 사우디에서 지난 9월 이후 수천명의 시민이 구금된 뒤 반정부 발언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쓰고 풀려났다고 전했다.

올해 33세인 빈 살만 왕세자는 2016년 사우디 전반을 개조하는 개혁프로그램 '비전 2030'을 발표하고 종교경찰 권한 축소, 영화 상영과 여성운전 허용 등 파격적인 조치를 내놓으며 젊은 개혁가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이런 개혁은 순전히 '왕실이 시키는 개혁'을 의미했다. 사우디 정부는 여성운전 허용을 3개월 앞두고 과거 이를 위해 싸워온 여성 인권운동가인 루자인 알 하스럴을 '왕실의 안정을 위협했다'는 혐의로 체포했고, 지난 5월에도 여권운동가 7명을 구속했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이달 사우디 검찰은 비전 2030 가운데 국영 에너지업체인 아람코의 기업공개(IPO)를 비난해 체포된 경제학자 잇삼 알 자밀을 반역죄로 기소했다. 아울러 빈 살만 왕세자는 지난해 11월 왕족과 기업인 등 유력인사 320명을 부정부패 혐의로 체포해 수도 리야드의 한 호텔에 감금하고 합의금이라는 명목으로 전 재산을 뜯어낸 뒤 풀어줘 자신의 권위를 과시했다.

이처럼 절대권력에 도취된 빈 살만 왕세자는 이제 국경을 넘나들며 권력을 휘두르는 중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이슬람 시아파 무장단체인 헤즈볼라에 너무 관대하다는 이유로 사우디를 방문한 사드 알 하리리 레바논 총리를 구금한 뒤 사임을 종용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같은 해 6월에는 시아파 이란과 우호적이라는 이유로 이웃 수니파 국가들을 동원해 카타르 국경을 봉쇄한 뒤 아직도 이를 풀지 않고 있다.

카쇼기의 실종으로 객원 칼럼리스트를 잃은 워싱턴포스트(WP)는 이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겨냥, 미국이 사우디의 방종을 부추겼다고 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태인 사위인 제러드 쿠슈너의 주도로 친이스라엘·반이란 정책을 취하고 있고, 이를 위해 이란과 원수지간인 사우디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지난 9일 카쇼기의 약혼녀 하티제 첸기즈는 약혼남이 자신과 결혼서류를 떼기 위해 영사관에 갔다 변을 당하자 WP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카쇼기 실종사건을 도와달라고 청원했다. 카쇼기 사건이 사우디 문제를 넘어 트럼프 정부와 쿠슈너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과연 트럼프 대통령이 고삐 풀린 사우디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pjw@fnnews.com 박종원 국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