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순의 느린 걸음]

우물쭈물 정책에도 암호화폐산업은 자란다


정부가 '암호화폐공개(ICO) 전면금지'라는 높은 장벽을 쳐놨지만 공개적으로 국내에서 ICO에 나선 기업이 나타났다. 토큰생성이벤트(TGE)라는 이름을 쓰지만 굳이 ICO가 아니라고 돌려 말하지도 않는다. 싱가포르나 스위스 같은 외국에 법인을 세워 우리 정부의 눈총을 피해갈 수도 있지만, 제주도에 법인을 세웠다. 이 회사는 현재까지 정부가 내놓은 암호화폐 관련 법률조항들을 꼼꼼히 검토했다고 한다. 정부에서 조사받으러 오라면 떳떳하게 가 조사도 받겠단다.

지난달 말 한 암호화폐거래소가 암호화폐 펀드 상품을 만들었다가 금융위원회로부터 "위법 소지가 있다"는 지적을 받은 뒤 폐업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업계 전체가 의기소침했었다.

그런데 그사이 다른 기업이 성장해 정부 눈치 보지 않고 떳떳하게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다.

정부가 2년 이상 블록체인, 암호화폐 산업에 대한 주무부처도 못 정하고 이렇다 할 정책방향도 제시하지 않은 채 우물쭈물하는 사이에도 우리 창업가들은 기업을 세워 사업을 일구고 있었다. 규제장벽에 막혀 실패를 맛보는 기업도 있지만, 그래도 또 도전하는 기업이 나온다. 업계에 다시 희망의 미소가 돈다.

최근 일본 금융당국이 암호화폐거래소협회에 거래소들을 자율적으로 규제하도록 권한을 줬다. 업계 차원에서 스스로 관리·감독하고 금융당국이 협회를 감시하는 정책구조를 선택했다. 철강, 자동차 같은 기존 산업처럼 암호화폐거래소도 하나의 산업군으로 인정한 셈이다. 일본 정부는 암호화폐 투자로 얻은 수익에 세금을 매기는 방안도 마련 중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ICO에 필요한 절차를 일반인도 알기 쉬운 언어로 안내서를 작성해 공개할 계획이라고 한다. 개발자들이 증권법을 어기지 않고 암호화폐를 개발해 거래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설명해 주겠다는 뜻이다.

미국과 일본이 빠르게 블록체인, 암호화폐에 대한 정책 틀을 만들어가고 있다. 프랑스도 법률을 만드는 중이다. 세계 여러 나라들이 분주하게 블록체인 기술과 암호화폐에 대한 정책을 다듬어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여전히 '검토 중'이다. 이달 중 ICO에 대한 정책 입장을 내놓겠다는 정부 입장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11월 정책 발표설이 잘못 전달된 일정이었다는 뒷얘기도 나온다. 업계는 다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더 이상 블록체인, 암호화폐에 우물쭈물하지 않았으면 한다.
수없이 도전하는 창업가들과 세계가 눈여겨보는 선진 시장을 갖고 있는 한국 정부라면 정책 만들기에 자신감을 가져도 좋지 않겠는가 말이다.

정부가 산업에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은 불확실성을 없애주는 것이다. 법률 근거도 없이 척박한 환경에서 끝없이 도전하는 한국의 창업가들에게 정부가 친절해져야 할 차례다.

cafe9@fnnews.com 이구순 블록포스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