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칼럼]

대통령에게 'No' 할 수 있는 비서실장

(보은=연합뉴스) 박병기 기자 = 2015년 10월17일 속리산 법주사의 미륵대불 개금불사 회향식에 참석해 대화하는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노영민 의원. bgipark@yna.co.kr

[율곡로 칼럼] 대통령에게 'No' 할 수 있는 비서실장

(서울=연합뉴스) 성기홍 논설위원 = 청와대 비서실 개편이 임박했다. 임종석 비서실장도 바뀐다. 새 비서실장으로 노영민 주중대사가 내정된 상태다. 발표만 남았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도 않고, 국회 청문회를 거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대통령 중심제에서 '권력 이인자'라 불리기도 하는 막강한 자리다.

비서실장 파워의 원천은 대통령의 신임과 거리이다. 국무총리나 집권당 대표도 비서실장만큼 대통령과 자주 만나지 못한다. 비서실장은 인사추천위원장으로서 고위직 인사에 영향력을 미친다. 대통령의 명을 출납하며 대통령으로 가는 모든 정보의 길목에 있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붙잡으려는 무수히 많은 사람과 정책 어젠다의 우선순위를 가려내고 조정하는 것도 비서실장이다.

하지만 비서실장에게 부여되는 권력의 크기와 비서실장이 역할을 잘 수행하느냐는 별개 문제다. 권력의 파이가 클수록 그 힘은 양날의 검이다. 대통령직의 성공 여부는 대통령의 역량과 자질이 최우선이지만, 비서실장의 보좌 스타일도 좌우한다. 비서실장의 실패가 대통령의 실패로 귀결되는 사례는 가까이에서 찾을 수 있다.

박근혜 청와대의 몰락은 고장 난 비서실 시스템도 원인이었다. 실세 비서실장 김기춘은 박 대통령을 '주군'이라 부르곤 했고, 대통령 뜻을 전하며 "윗분의 뜻을 받들어"라는 예스러운 표현을 사용했다. 봉건시대 '왕과 신하' 관계처럼 청와대가 굴러간다고 여겨졌다. 하물며 군주제 법도를 적은 서경(書經)에도 "임금은 신하들의 간언을 따라야 훌륭한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적혀 있지만, 박근혜 청와대는 거꾸로 갔다. 1년 3개월 비서실장으로 일한 이병기는 박 대통령과 독대한 횟수가 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비선 최순실이 잉태된 토양이고, 국정이 붕괴한 출발이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한 달 전인 2016년 12월 16일 백악관의 일이다. 트럼프 행정부 초대 비서실장 내정자인 라인스 프리버스를 오바마 행정부 마지막 비서실장 데니스 맥도너가 초청한 조찬 자리였다. 공화·민주당 행정부를 막론하고 10명의 전직 비서실장들이 함께했다. 돌아가며 새내기 비서실장에게 성공적 직무 수행을 위한 조언을 한마디씩 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자리에는 람 이매뉴얼을 비롯, 자신을 보좌한 역대 비서실장들도 있었다. 오바마는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분들이 비서실장 할 때 나를 열 받게 하는 얘기를 참 많이 했습니다". 조찬장에 웃음이 일었다. "물론 이들의 견해가 항상 옳지는 않았습니다. 내 생각이 옳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나를 열 받게 하는 견해를 전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내가 듣고 싶어하는 얘기가 아니라 내가 듣기 싫지만 들어야만 하는 얘기를 하는 게 이들의 임무였습니다". 오바마는 프리버스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비서실장의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대통령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을 위해 그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기를 바랍니다".

안타깝게도 프리버스는 그 역할을 못 한 채 6개월 만에 물러났다. '제멋대로' 하고 싶어하는 트럼프가 쓴소리를 듣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듣기 싫어도 들어야만 하는 얘기를 하는' 비서실장의 공간을 용납하지 않았다. 트럼프 백악관 비서실의 공적 시스템은 고장 나기 시작했다.

대통령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비서실장이 대통령에게 '아니오'(No)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은 늘 격무에 시달린다. 참모들이 '심기 경호'에 매달리는 이유다. 듣기 좋은 맞춤형 보고를 우선하기에 십상이다. 열 받게 하는 얘기로 행여 대통령의 눈 밖에 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비서실장은 이 유혹을 거부하고 통제해야 한다. 아닐 때는 아니라고 간언해 대통령의 주의를 환기하고, 대통령의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자서전 '운명'에서 비서실장 시절을 회고한 대목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청 분리' 방침과 임기 말 기자실 통합 정책에 당시 비서실장 문재인은 회의적이었고, 좋은 취지임에도 시기상조이자 무리한 정책이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뜻을 꺾지 못했다. 문 대통령은 "그때 더 대통령을 설득하지 못했던 게 후회됐다"고 술회했다.

이처럼 문 대통령은 '아니오'라고 말하는 비서실장의 필요성을 체득하고 있다.
새 비서실장에 내정된 노영민은 문 대통령의 최측근이다. 2012년 대선 때 후보 비서실장이었고, 2017년 대선 때 경선 캠프와 선대위 조직본부장으로 일해 문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 이러한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은 비서실장의 권력을 강화하는 디딤돌이 아니라, 비서실장이 대통령에게 '아니오'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신뢰 자산으로 활용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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