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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로] '네편 내편' 그 오싹함에 대해

김용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4.04 17:39

수정 2019.04.04 17:39

[윤중로] '네편 내편' 그 오싹함에 대해

'네편 내편', 이 말에서 오싹함을 느낀 건 얼마되지 않았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삶에서 편가르기는 불가피하다. 인생은 수많은 편가름의 연속이라고 할 만큼 편가르기는 자연스러운 사회적 현상인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편이 나눠지는 방식은 무척 다양하다. 편은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기도 한다. 한국에서 태어나면 한국편, 미국에서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미국편이 된다.
영남에서 태어나면 영남편, 호남에서 태어나면 호남편, 충청도에서 태어나면 충청편 뭐 이런 식이다.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태생적 편가름이 요즘 문제가 되기도 하는데, 점점 심각해지는 남성과 여성 간 갈등구조다.

태생적인 편가름까지는 아니지만 내 의지대로 편이 갈리지 않는 경우 또한 수없이 많다. 학교에 입학해 A학교에 다니면 A학교편이고, B학교에 다니면 B학교편이다. 이른바 '뺑뺑이'를 돌려서 결정된 학교가 내편 혹은 네편이 된다. 또 1반에 배치되면 1반편, 2반에 배치되면 2반편이다. 편이 나뉘는 과정을 보면 실소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내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결정된 편가르기에 따라 각자가 어느 편인가에 서게 되고, 그 편이 삶의 중요한 변수가 되기도 하니 아이러니다.

'가위바위보'나 '데덴치' 처럼 운에 맡겨져 편이 갈리기도 한다. 축구나 족구시합을 하는 등 주로 놀이를 하기 위해 이러한 방식으로 편을 나눈다. 편을 나누지 않으면 놀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운에 맡겨 무작위로라도 편을 가른 것이다.

아쉽게도 우리 사회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편가름에 대해서조차 관대하지 못하다. 어느 편으로 규정되느냐에 따라 '나'라는 개인은 사라지고 '편'만 남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한국사람들은 어떻다든가, 일본사람들은 어떤 성향이 있다라든가 하는 식이다. 한국에서 망국병이라는 지역색도 마찬가지다. 개인이 아닌 그 편의 전체를 일정한 틀안에 가두고 억지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편이 나뉘는 방식을 보면 편을 갈라 아웅다웅 다투는 게 이상하게 보일 정도인데도 말이다.

본인의 생각이나 의지 또는 취미에 따라 편이 갈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테니스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은 야구를 좋아해 동호회나 팬클럽에 가입하면서 자연스럽게 무리가 정해진다. 특히 보수와 진보는 개인의 성향이나 생각에 따라 편이 갈린 대표적인 사례다. 수많은 편가름 중 본인의 의지에 따라 편이 갈린 사례여서 남다른 점이 있고, 그래서 대립구조는 조금 더 날카롭다. 사실 보수와 진보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남이 갈라놓은 편가름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어쨌든 개인의 선택이 작용했다.

이처럼 많은 편가름 때문인지 '네편, 내편'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의 편가름 현상은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해 보인다. 네편을 비난하는 수준이 저주를 퍼붓는다고 할 정도로 심각하다. 막말은 물론 쌍욕까지 거침이 없다. 주목을 받고 싶은 건지, 화풀이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도를 넘었다. 더욱 문제되는 것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서 편에 대한 애정이 집착이나 광기로 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수준이 지나쳐 합리적인 조정을 통해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면 이후에 기다리는 것은 결국 사회적 혼란뿐이다. 이는 어느 편이든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오싹함이 느껴지는 지나친 편가르기는 이제 멈춰야 할 때다.

yongmin@fnnews.com 김용민 산업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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