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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차 징크스' 이수진 감독... 다음 기회 있을까? [김성호의 영화가난다]

김성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4.20 08:00

수정 2019.05.18 04:10

[김성호의 영화가난다 4] 이수진, <우상>
포스터 ⓒ CGV 아트하우스
포스터 ⓒ CGV 아트하우스

'이년 차 징크스(Sophomore jinx)'란 말이 있다. 데뷔 첫 해에 뛰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가 2년 차에 현저히 떨어지는 성적을 기록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스포츠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주목해 탄생한 이 말은 이내 음악과 영화 등 문화계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처음 거둔 성공에 부담감을 느끼거나 자만하게 되어 과거와 같은 성취를 거두지 못하는 일이 인간에게 자주 나타난다는 뜻이겠다.

영화계에서도 이년 차 징크스를 겪은 인물이 적지 않다. <브이 포 벤데타>로 데뷔해 할리우드 제작사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으나 이제는 그저 그런 감독으로 전락한 제임스 맥티그, SF영화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가타카>의 앤드류 니콜, 감독 데뷔작 <늑대와 춤을>로 아카데미를 휩쓴 케빈 코스트너, 더 올라가면 역사상 최고의 로드무비로 꼽히는 <이지 라이더>를 만든 데니스 호퍼 등이 모두 그렇다.


한국에선 이수진 감독이 이 대열에 합류했다. 지난달 개봉한 <우상>이 그의 두 번째 영화를 기다려온 팬들을 크게 실망시킨 것이다. 첫 작품 <한공주>로 섬세한 표현과 탄탄한 구성에 있어 실력을 인정받은 이수진이지만, <우상>에선 그 같은 장점을 찾을 수 없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정말 같은 사람이 만든 것인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2억에서 98억으로, 제작비는 49배 뛰었지만

이수진 감독과 주연배우 설경구. <한공주>의 성취 이후 굵은 끈을 붙잡은 듯 보였던 이수진 감독이 <우상> 이후 어떤 길을 걷게 될지 주목된다. ⓒ CGV 아트하우스
이수진 감독과 주연배우 설경구. <한공주> 의 성취 이후 굵은 끈을 붙잡은 듯 보였던 이수진 감독이 <우상> 이후 어떤 길을 걷게 될지 주목된다. ⓒ CGV 아트하우스

이수진 감독이 <우상>의 연출을 맡았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만 해도 그 앞에는 탄탄대로가 놓여 있는 것만 같았다.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지목되는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직접 제작·투자했다는 점부터가 그랬다.

2017년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이후 영화 크레딧에서 찾아볼 수 없던 이 부회장의 복귀작인 만큼 얼마나 고르고 고른 감독이었을지 보지 않아도 훤하다.

제작비만 봐도 이수진 감독이 얼마나 기대를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전작 <한공주>가 불과 2억 원 남짓으로 제작된 데 반해, <우상>의 제작비는 98억 원으로 49배나 늘었다. 한국영화 편당 평균 제작비 26억 원은 물론이고, 상위 40편의 평균 제작비 80억 원도 훌쩍 뛰어넘는 규모다. 대작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뚜껑을 연 영화는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CJ가 대규모로 투자·배급한 영화가 대개 그렇듯 상당수 평론가가 크게 나쁘지 않은 평가를 내렸으나 관객들의 평은 참담한 수준을 면치 못했다. 14일 기준, 포탈사이트 네이버와 다음의 관람객 평균평점이 모두 10점 만점에 5점도 되지 않는 것만 보더라도 영화가 관객들에게 어떤 감상을 남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2시간20분짜리 듣기평가? 쏟아지는 혹평들

영화는 좋은 정치인처럼 보였던 명회(한석규 분)가 충격적인 사건들과 마주하며 차츰 제 안의 흉측한 부분을 내보이는 정치드라마의 구조를 갖고 있다. ⓒ CGV 아트하우스
영화는 좋은 정치인처럼 보였던 명회(한석규 분)가 충격적인 사건들과 마주하며 차츰 제 안의 흉측한 부분을 내보이는 정치드라마의 구조를 갖고 있다. ⓒ CGV 아트하우스

<우상>은 정치드라마와 미스터리, 스릴러, 심지어는 호러영화의 특징을 차례로 내보인다. 2시간20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 동안 이들 장르 가운데 어느 하나도 맺음 짓지 못하면서도 경계를 거듭 넘나드는 모습에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다.

시간이 흐를수록 잔인한 장면과 자극적인 대사도 쏟아진다. 선명하게 보이는 목이 잘린 시체라거나 여자를 납치해 발톱 밑에 주사기를 깊이 꼽는 장면 등이 모두 그러한데, 이를 통해 얻고자 하는 효과가 무엇인지가 불명확하다. 특정한 순간부터 쏟아지는 이런 장면들은 기우는 배를 다시 세우기 위한 발버둥처럼 보일 정도다.

극중 인물들이 내리는 선택 역시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영화는 마땅히 설명해야 할 부분을 미지수로 남기고 넘어가기 일쑤로, 상당수 관객이 흐름을 놓치고 혼란스러움을 표하는 걸 막을 수 없을 듯하다.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 부분도 문제다. 상당수 관객들이 <우상>을 가리켜 '2시간20분짜리 듣기평가'라며 조롱하고 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과연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극중 몇몇 배우의 대사는 너무 불명확해 자막이 필요하다고까지 느껴지는데, 감독과 제작진이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세탁기 앞에서 들려온 믿을 수 없는 목소리

이수진 감독의 장편데뷔작 <한공주>의 주연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오른 천우희는 이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우상>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 CGV 아트하우스
이수진 감독의 장편데뷔작 <한공주> 의 주연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오른 천우희는 이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우상> 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 CGV 아트하우스

무엇보다 당혹스러운 건 특정 배우의 목소리 연기가 이 정도 규모의 영화에선 찾아보기 힘들 만큼 형편없다는 점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10여분 정도 흘렀을 때 세탁기 앞에서 명회(한석규 분)와 아내(강말금 분)가 나누는 대화 장면이 그런데, 강말금의 대사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소를 터뜨리게 할 정도다.

극의 흐름 상 매우 중요한 장면이지만 누가 봐도 이상한 어조로 대사를 읊는 모습을 그대로 최종본에 삽입한 제작진의 판단이 정상적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제작과정에서 감독이 이를 다시 녹음하도록 할 수 없었을 정도의 문제가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든다.

<우상>은 전반적으로 어수선하고 너저분한 영화다. 무언가 그럴 듯한 이야기를 풀어내려는 듯도 싶지만, 막상 뜯어보면 어디서 많이 본 뻔한 설정과 어느 하나 갈무리되지 않는 장르들을 섞어놓았을 뿐이다.
한석규와 설경구의 열연에도 구해낼 수 없을 만큼 멀리 가버린 영화는 결국 이수진 감독에게 지울 수 없는 실패를 안기고 말았다.

근래 한국영화계에서 이수진 만큼 이년 차 징크스에 제대로 빠진 감독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흥행과 작품성 모두에서 참담한 실패를 경험한 이수진 감독에게 다음 기회란 것이 있을지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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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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