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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친일 이광수와 친북 김원봉의 功過 평가

안삼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6.03 17:28

수정 2019.06.03 17:28

[fn논단] 친일 이광수와 친북 김원봉의 功過 평가

역사적 인물을 평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구한말에 태어나 망국의 과정, 일제의 강점기와 분단된 독립 그리고 동족끼리 싸워야 했던 6·25 등의 극심한 굴곡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간단할 수 없다.

이 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이 최근 이슈의 인물로 떠올랐다. 춘원 이광수와 약산 김원봉이다. 이광수는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에 그의 딸이 참석하려 한다 하여 뉴스가 됐다. 28독립선언서 작성에 이광수가 깊이 간여했기에 딸로서 참석하고 싶어했겠지만 주최 측에서는 그의 가족이 참석하는 것이 큰 부담이 됐을 것이다.
김원봉은 '암살'이라는 영화에서 의열단 단장으로 소개되면서 강한 인상을 남겼고,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고 싶다' 했다는 고위층의 말이 전해지고 '이명'이라는 드라마가 만들어지면서 정치적 쟁론까지로 비화돼 있다.

두 사람 모두 항일 투쟁가였다. 이광수는 당대의 작가이자 언론인으로서 우리 민족이 처한 시대상황을 아파하며 고민했고, 나라를 찾는 길은 우리 민족이 개화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민족을 깨우려는 계몽 소설과 글들을 남겼을 뿐 아니라 상하이 임시정부수립에 참여했을 만큼 적극적인 행동가이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우리 민족이 독립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면 일제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민족의 힘을 키우자는 민족개조론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독립 의지를 꺾었다. 김원봉은 당대의 투사였다. 독립을 이루는 길이라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행동으로 옮겨서 일제강점기 가장 큰 현상금의 주인공이 될 정도였다. 의열단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공산당 운동에 집중했고, 독립 후 민주진영인 남쪽으로 환국했으나 결국은 월북해 북한 공산정권의 수립에 참여했고 6·25를 후방에서 도왔다.

두 사람 모두 이 민족이 사랑했던 사람들이었기에 이광수의 변절이 준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김원봉이 6·25 동족상잔을 일으킨 무리에 껴서 만들어낸 상처는 너무 깊었다. 이들의 다른 공이 아무리 크더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수많은 이광수와 김원봉을 만들어냈다. 그러다보니 이들뿐 아니라 그 시대를 이끌어온 상당수가 친일에 이름을 올렸고, 공산정권과 연관된 인사들의 행적은 아예 입에 담지 않아서 역사에서 지웠다. 그러면서 역사의 곳곳에 빈곳이 생기게 됐다. 어쩔 수 없었지만 이렇게 자리잡은 이분법적 사고는 근래의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 선명성을 강조하는 폐쇄적 진영논리로 뿌리를 내렸다. 그러다보니 같은 진영에 있는 사람이면 무조건적으로 포용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거리낌 없이 비판하고 배제한다. 중도의 제3지대가 우리 정치에서 성공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최근 김원봉의 공과 과를 분리해 공을 인정하려는 시도를 주시하게 된다.
많은 도전과 반발이 일고 있다. 이런 시도는, 평가하려는 대상을 진영논리에 따라 선별하고 힘으로 처리해서는 또 다른 국민적 갈등을 만들어내지 않아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진영을 떠나 누구든 과는 분명히 정죄하되, 그 시대와 활동영역에서 이룬 공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평가하는 과정에서 우리 정치와 사회 속에 깊이 뿌리내린 부정주의를 긍정주의로 바꾸는 시작점이 될 수 있겠다는 기대에서다. 이제라도 우리 역사의 빈 부분들을 채워넣자.

한헌수 숭실대 전자정보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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