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업의 ‘소비자 인지 감수성’/백대용 소비자시민모임 회장 변호사

최근 일련의 법원 판결들로 인해 국민의 인식 속에 새롭게 자리잡은 '성인지 감수성'이란 개념이 있다. 이 개념에 대한 합의된 정의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성별 차이로 인한 차별과 유불리함 또는 불균형을 인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마디로 성범죄 사건의 경우 피해자인 여성 입장에서 사건을 들여다보고 문제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함을 뜻한다. 성인지 감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은 여성에 대한 실질적 배려와 공감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밝힌 혁명적인 판단이었다.

최근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금지와 관련해 세계무역기구(WTO) 상소심에서 한국이 극적으로 승소했다. 1심 패소를 뒤집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 속에서 나온 결과였기에 그 기쁨이 무척 컸다. WTO 상소심은 과학적 기준에만 기초해 위험성 여부를 판단한 1심과 달리 다양한 환경적 요소와 식품안전이라는 정성적 기준을 중요시했다. 한마디로 방사능물질과 관련된 수치가 과학적 기준에 미달한다 하더라도 이를 수입하는 국가의 국민이 그 안전성에 관해 여전히 불안해한다면 이런 불안감을 최소화하기 위한 수입국의 금지조치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소비자의 감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WTO 상소심의 판결은 수입국 국민에 대한 실질적인 배려와 공감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밝힌 혁명적 판결이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면,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8년 미국 뉴저지주의 어떤 소비자는 자동차를 구매한 후 이동하는 길에 갑작스럽게 시동이 꺼지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 소비자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딜러에게 환불을 요구하게 되는데 딜러가 이를 거절하면서 소송이 시작됐다. 이 사건과 관련, 뉴저지 법원은 "대다수 사람에게 신차 구매는 큰 투자이며, 차량에 대한 신뢰성과 안전성으로부터 나오는 마음의 평화가 중요하다. 그 신뢰가 한번 흔들리면 차량은 그들에게 가치를 잃을 뿐만 아니라 차량 운행은 불안과 우려로 가득차게 된다"고 판단했다. 이 또한 자동차 구매자에 대한 배려와 공감이 중요함을 밝힌 판결이었다.

앞선 사례들은 서로 다른 시기 서로 다른 내용에 관한 것이지만 우리가 주목해야만 하는 중요한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에 대한 실질적 배려와 공감이 판단의 중요한 기초가 됐다는 점이다. 과학적 근거, 객관적 기준 등과 같은 정량적 기준보다는 여성이나 소비자 입장이나 이들의 마음의 평화와 같은 정성적인 기준에 더 무게중심을 두는 시대적 변화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도도한 흐름이 됐다. 50여년 전 미국의 뉴저지주에서 언급했던 '소비자의 마음의 평화'가 성범죄 사건이나 WTO 사건과 같이 어찌 보면 전혀 상관도 없어 보이는 다양한 영역에서 우리도 모르게 이제는 대세가 돼버리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임블리의 호박즙 곰팡이 사건이 임블리가 영위하고 있는 사업 전반에 거친 불매운동과 관계당국의 조사로 이어지는 것은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소비자 인지 감수성'이 없는 기업이 처할 수 있는 상황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이제는 법과 규정보다 상대방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더욱 중요한 시대다.
기업들도 이런 시대적 흐름의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소비자 인지 감수성'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기업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갖춰야만 하는 필수요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