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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천지의 다짐’… ‘북한 본심’ 읽어야 발목 안잡혀

김병덕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9.18 18:13

수정 2019.09.19 10:02

‘공동선언 의미·한계’ 전문가 평가
빛바랜 ‘천지의 다짐’… ‘북한 본심’ 읽어야 발목 안잡혀
빛바랜 ‘천지의 다짐’… ‘북한 본심’ 읽어야 발목 안잡혀
지난해 9월의 평양은 달랐다. 18일 평양에 도착한 문재인 대통령은 10만여명에 달하는 평양시민들의 환영을 받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남부터 환영행사까지 모든 장면은 영상으로 남측에 중계됐다. 다음날인 19일에는 군사적 적대관계 종식, 핵 위협이 없는 한반도, 교류협력 증대를 골자로 한 역사적인 평양공동선언이 채택됐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간 세번째 만남 만에 이룬 성과였다. 평양 방문 마지막날인 20일에는 양 정상이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바라보며 "새로운 역사를 쓰자"고 함께 다짐했다.

9·19 평양공동선언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 모든 것은 한여름밤의 꿈과 같은 얘기가 됐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비무장화가 이뤄지고,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고 현대화하는 사업이 착공되는 등 남북관계에 획기적인 진전이 오는 분위기였지만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은 이 모든 것에 찬물을 끼얹었다.

■"9·19선언, 익지도 않은 과일 땄던 것"

9·19 평양공동선언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갈린다. 긍정적인 측면은 남북관계라는 긴 흐름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됐다는 점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남북관계는 항상 가다서다 하며 갈등과 협력을 반복했다"면서 "2017년과 2018년도의 남북관계는 극과 극이었고, 그런 측면에서 2018년도는 문재인정부 평화번영 대북정책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의 소강국면도 '하노이 노딜'이라는 북·미 간의 문제가 원인이기 때문에 실무협상이 열리면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라는 시각이다.

남북관계가 설익은 성황에서 너무 급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영수 서강대 교수는 "남북관계는 정상끼리 만난다고 해서 풀리는 얕은 과제가 아니다"라며 "70여년 동안 묵은 과제이기 때문에 이를 풀려면 남북이 통합 분위기로 가야 정상이 맺은 합의가 의미가 있다"고 지적했다. 남북이 아직은 풀어야 할 것이 많은 상황에서 너무 앞서나갔다는 것. 김 교수는 "익지도 않은 과일을 따놓고 맛있다고 한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북한의 태도변화를 지나치게 낙관했다는 시각도 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형식적 합의가 이뤄진 것에 근본적 원인이 있다"면서 "체제보장이 되고 위협이 해소되면 북한이 비핵화를 할 것이라는 과신을 하고 협상을 했는데 근본적 비핵화 방법이나 비핵화 접근방식에서 북한은 변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 간의 합의들이 핵문제에 결부되면서 진척되지 않는 상황을 맞게 된 것으로 평가했다.

■북·미 실무협상 끝나면 봄이 올까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일단은 북·미 관계가 해소돼야 한다. 북·미 간 비핵화 협상에 남북관계가 엮여 있는 만큼 합의가 도출되는 과정에서 우리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양 교수는 "북·미 실무협상이 빨리 재개돼 성과가 나오도록 한·미 간의 철저한 조율이 중요하다"면서 "실무협상이 진행되면 3차 북·미 정상회담으로 갈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남북 간의 대화도 재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북한은 통미봉남(通美封南)이 아니라 선미후남(先美後南)"이라며 "너무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근본적 변화를 위해서는 다양한 접촉채널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김 교수는 "지금은 정상들만 만나고 일반 사람은 아무도 왕래를 못하는데 그러면 서로를 모르고 오해만 쌓인다"면서 "남북 구성원들이 자주 만나서 아주 작은 변화를 축적시켜 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특히 이산가족상봉 같은 경우 과감히 민간에 넘기는 방안도 제시했다.

문성묵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은 북한이 요구하는 것을 우리 정부가 해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북한이 먼저 핵문제에 대해 전향적 입장을 보여야 대응이 가능하다는 것.

문 센터장은 "남북관계는 정치적으로 성과를 내겠다는 조급증으로만 정책을 해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우리의 원칙과 입장을 유지하면서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해법이라고 본다"고 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숨고르기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북한 본심' 읽어야 다시 발목 안잡혀

9·19선언 이후에도 남북관계에 의미있는 진전은 얻어내지 못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신 센터장은 "형식적 측면에서의 진전은 일부 있었지만 내용적 측면에서는 과연 근본적으로 변화했느냐고 묻는다면 변화는 없다고 평가한다"면서 "북한은 자신들이 유리한 것만 내줬다"고 꼬집었다. 대표적 사례로 감시초소(GP) 철거를 들었다.
각각 11개씩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는데 북한의 절대량이 많았다는 점에서 문제로 제기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우리가 노력하면 북한이 어느 정도 호응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북한의 진정한 속뜻을 못읽었다"면서 "우리의 변수가 영향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문 센터장은 "북한의 비핵화, 남북관계 발전, 지속가능한 평화라는 기본방향은 맞다"면서도 "북한이 비핵화를 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cynical73@fnnews.com 김병덕 강중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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