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그게 연출의 시작"

신진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09.23 16:27

수정 2019.09.25 09:05

한국 창작오페라 '1945' 맡은 고선웅
원작자 배삼식·작곡가 최우정과 '환상의 드림팀'
해방직후 갈곳 잃은 민초들의 삶 생생하게 그려
"대본·음악 탄탄… 즐거운 마음으로 작품 만들 것"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그게 연출의 시작"

(왼쪽부터) 작곡 최우정 지휘 정치용 연출 고선웅 대본 배삼식 /사진=fnDB
(왼쪽부터) 작곡 최우정 지휘 정치용 연출 고선웅 대본 배삼식 /사진=fnDB

일본인 위안부 미즈코 역의 김순영 /사진=fnDB
일본인 위안부 미즈코 역의 김순영 /사진=fnDB

막난과 섭섭은 서로 과거도 묻지 않고 정을 나눈다 /사진=fnDB
막난과 섭섭은 서로 과거도 묻지 않고 정을 나눈다 /사진=fnDB

여동생을 먼저 떠나보낸 인호 역의 이원종과 한국인 위안부 분이로 분한 이명주 /사진=fnDB
여동생을 먼저 떠나보낸 인호 역의 이원종과 한국인 위안부 분이로 분한 이명주 /사진=fnDB

"제가 사는 방식이, 심장이 움직여야 합니다. 배삼식 작가와 최우정 작곡가를 평소 존경했는데 함께 작업할 기회가 없었죠. 오페라 '1945'로 드디어 그 인연이 왔습니다."

고선웅(51) 연출은 작품성·대중성을 모두 아우르는 공연계 히트작 제조기로 통한다. 마치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다양한 장르를 오간다. 올해도 신작 연극 '낙타상자'(연출),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극본·작사·연출)를 선보였다.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창극계서 외면 받던 '변강쇠전'을 고선웅 연출이 특유의 발칙한 원작 비틀기와 인간애 넘치는 이야기로 되살려내, 국립창극단의 스테디셀러로 만들었다.
늘 러브콜을 받는 그가 오는 27~28일 국립오페라단이 초연하는 한국 오페라 '1945'의 연출자로 나섰다. 오페라는 2016년 서울시오페라단의 '멕베드' 이후 두 번째다.

■연출가라면 자신감은 필수

공연은 임박했는데 연습시간은 빠듯해 여유롭진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장르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 보였다. 고선웅 연출은 "뮤지컬이나 창극도 어려운데 다 해봤다"며 "이번 오페라는 창작이라 이탈리아어로 연기하는 것도 아니니 완전 자유롭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자신감을 '협업의 중재자'인 연출자가 갖춰야 할 미덕으로 보는 듯했다. "연출자가 표현하는 일에 겁먹고 두려워하면 대책이 없다"며 "재미있는 오페라를 만들 그 해답을 내가 찾았는지 모르겠지만, 과한 확신을 갖고 밀고 간다"고 말했다. 어떤 장르건 "지루한 것은 못견뎌한다"는 그다. "오페라에서 아리아나 음악이 흐를 때 극적 텐션이 무너지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유지할지 궁리중입니다. 또 음악과 가사의 의미를 잘 전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될 일은 된다'라는 제목의 책을 좋아한다는 그는 "이번 공연은 흐름 속에 내맡기면 될 것 같다"며 "창작진이 이견 없이 출발시킨 배로 순항중이고 항로도 괜찮다"고 부연했다.

'1945'는 국립극단이 2017년 선보인 배삼식 작가의 동명 연극이 원작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만주에 살던 조선인들이 조국행 열차를 타기 위해 머물던 전재민 구제소가 무대다. 한글 강습회를 열고 싶은 지식인 구원창부터, 떡 장사를 원하는 현실적인 그의 아내 김순남, 서로 과거는 묻지 않고 정을 나누는 장막난과 박섭섭 그리고 조선인 위안부 분이까지 민초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린다. "인간의 자비심을 믿고 싶었다"는 배삼식 작가는 '1945'를 직접 4막 14장의 오페라 리브레토로 각색했다. 앞서 배 작가와 음악극 '적로'를 성공리에 올린 최우정 작곡가는 1930~1940년대 유행하던 창가와 군가, 종교음악, 클래식 등을 다양하게 적용했고, '엄마야 누나야' '울리는 만주선' 등 익숙한 노래도 넣었다.

고선웅 연출은 "다양한 인물 군상이 나오는데 산만하지 않고 짜임새가 있다"며 "한마디로 대본이 좋고 클래식 고유의 격조에 싱어의 절절한 노래가 감동을 준다"고 귀띔했다. "이름조차 외우기 힘든 서양 오페라와 달리 모든 인물이 쉽고 납득할 수 있게 다가옵니다. 마지막 조국행 열차를 타는 인물들과 타지 못하는 인물들의 사연이 짠하고, 또 진한 감동을 줍니다."

■좋은 연출·극작 기본은 사랑

국립창극단의 이소연 단원은 고선웅 연출에 대해 "사람을 사랑하는 연출가"라고 말한다. "출연진과 스태프 모두를 존중하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대해, 모두가 그의 연출 방식을 따르게 만들며, '우리 모두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부연했다. 고 연출은 좋은 극작가·연출가의 요건으로 "사랑"을 꼽았다. 연습실에서 출연진·제작진들의 마음 상태를 확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려면 무조건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걸 마흔 넘어서 깨달았죠. 오십 넘어 다시 생각해봐도 그게 맞더라고요. 사랑해야 비로소 모든 게 시작됩니다." '1945'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늘 해학을 잃지 않는 고 연출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될 것으로 기대된다. 일본인 위안부 미즈코 역의 소프라노 김순영은 "고선웅 연출께서 굉장히 슬픈 장면을 해학적으로, 웃을 수밖에 없게 표현해 그게 더 슬펐다"고 말했다.

국립오페라단은 1962년 창립작 '왕자 호동'을 시작으로 '천생연분'. '봄봄', '동승', '처용', '주몽' 등 한국 오페라 발굴에 힘써왔다. 하지만 아직 내세울 만한 스테디셀러는 없다. 한국 오페라 초연작을 도맡아 지휘해온 정치용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예술감독은 이번 작품에 거는 기대가 크다. 그는 "한국 창작오페라가 활성화되길 기다려온 사람으로서 '1945'를 만나고 큰 기쁨을 느꼈다"며 "예술성과 대중성을 갖춘 문제작이 될 것"으로 자신했다.


주변의 기대와 작품 규모 때문에 부담감이 클 법도 한데, 연출 30년차 고선웅은 현답을 내놓았다. "잘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강하면 작품에 힘이 들어가죠. 그럼 보는 사람도 불편하고,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도 지칩니다.
제 영혼이 자유로워야 편안한 작품이 나와요. 부담감은 내려놓고 즐겁게 하려고요. 제 길을 그저 뚜벅뚜벅 가렵니다." 27~28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