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스트리트]

하비브 하우스

덕수궁 돌담길을 걷기 좋은 계절이다. 가을 정취를 만끽할 수 있어서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낙엽을 밟으며 '시간여행'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정동길 주변엔 기념비적 근대문화유산이 널려 있어서다.

주한 미국대사관저도 그 하나다. 인근의 129년 된 영국대사관이나, 거장 김중업이 설계한 프랑스대사관도 한국 근대건축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1883년 서양권 국가의 첫 외교공관(공사관)으로 자리 잡은 미대사관저가 역사성에선 가장 앞선다. 건축가이자 민속학자인 조자용이 설계해 1976년 신축한 '하비브 하우스'다. 당시 미 국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옥을 고집한 필립 하비브 대사(1971~1974년 재임)의 이름을 땄다. ㅁ자 구조 안뜰엔 경주 포석정을 재현한 연못도 있다.

한국대학생진보연합 소속 대학생들이 지난주 담장을 넘어 하비브 하우스에 난입해 파문을 일으켰다. 관저 안에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다 19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나라 안팎에서 아연 긴장하는 분위기다. 집회를 주도한 대진연이 친북·반미 성향을 보였다는 일각의 지적과 함께 과거 미국문화원 방화나 마크 리퍼트 전 미국대사 피습사건을 떠올리면서다.

물론 외교공관은 치외법권 지대는 아니다. 그러나 1964년 체결된 '빈 협약'은 '공관지역은 불가침'이라고 못 박고, 접수국이 "공관의 안녕을 교란시키거나 품위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할 특별한 의무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건 전개 과정에서 우리 경찰의 허술한 대응이 문제가 되는 이유다. 남녀 대학생들이 백주에 사다리를 놓고 월담하는 동안 멀거니 바라보다 고작 "여학생 신체접촉이 어려워 여경을 기다렸다"고 둘러댈 정도라면. 사건 이후 미 국무부는 유감 논평을 낸 이후 방위비 분담금 인상 필요성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보도자료까지 내놨다. 외교공관을 무대로 한 불법시위에 원칙 있는 대응을 하지 않아 명분뿐 아니라 실리까지 놓치는 결과를 초래할까 사뭇 걱정스럽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