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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버지가 남긴 40통의 이메일 [김성호의 영화가난다]

김성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9.12.14 20:23

수정 2019.12.14 20:23

[김성호의 영화가난다 11] <아버지의 이메일>
[파이낸셜뉴스] '평생 가난했고, 항상 떠돌았고, 자주 취하셨던, 내 아버지의 삶. 그런 당신의 삶을 지금 만나러 갑니다.'

포스터 ⓒ인디스토리
포스터 ⓒ인디스토리

<아버지의 이메일>. 개인적으로는 극장에서 본 첫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일흔셋 아버지가 죽기 얼마 전부터 딸에게 보내온 마흔 통의 이메일, 속 시원히 털어놓지 못했던 지난 삶을 회고하고 조용히 용서를 구하는 죄 많은 아버지의 흔적으로부터 시작하는 영화다.

평생을 가난했고 항상 떠돌았으며 자주 취하셨던 아버지, 알코올중독에 폭력까지 행사하며 아내와 자식들에게 씻기 어려운 고통을 남긴 못난 아버지의 삶이 이제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된 둘째 딸의 손에서 짜맞춰지는 것이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이북에 남겨두고 열넷의 나이에 홀로 남한으로 내려와 미군부대의 잡역부로 일하고, 결혼해서는 베트남 파견기술자로 사우디의 건설노동자로 떠나가 일했으며, 끝도 없이 이어진 좌절 속에서 방 문을 굳게 닫고 술에 젖어 살아갔던 아버지의 삶.

가족들에게 많은 생채기를 냈던 아버지를 이제는 용서하기 위해서 딸은 먼저 그를 이해하고자 했다. 아버지가 남긴 마흔 통의 이메일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 그가 남긴 물건 등을 단서로 삼아 아버지의 삶을 추적해 나가는 것이다.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시작한 작업이 우리의 굴곡진 현대사와 불가피한 접점을 가지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한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온 가족을 괴롭힌 아버지의 문제가 사실은 우리의 지난 역사와 문화라는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관점과 결코 떨어져서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설득력있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딸들의 옛 사진 ⓒ인디스토리
아버지와 딸들의 옛 사진 ⓒ인디스토리

영화는 월남과 6.25전쟁, 베트남 파병과 중동 건설 붐, 외국 이민과 독일 광부 파견, 88올림픽, 심지어는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금호동 뉴타운 재개발 문제에 이르기까지 내 아버지의 삶이 결코 우리의 굴곡진 현대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란 사실을 웅변한다. 사회가 개인의 삶에 얼마만큼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그려내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구조적 관점에서 사회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아버지를 이해함으로써 용서할 수 있다고 믿었던 딸이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것이었던가를 깨닫게 되는 순간에 이르러, 지나간 역사와 오늘, 죽은 아버지와 남겨진 가족들 사이의 간극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이쯤되면 이 한 편의 다큐멘터리는 지난 시대와 화해하지 못한 우리 세대의 자화상으로도 볼 수 있다. 개인의 삶과 한 가족의 아픔을 넘어 지난 시대의 문제를 들춰내고 그 문제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발하며, 나아가 현재와 과거가 단절되어 좀처럼 화해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시대의 초상을 그려내는 작품으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겠다.

영화 속 아버지의 노년. ⓒ인디스토리
영화 속 아버지의 노년. ⓒ인디스토리

한껏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인간의 인생 속에 녹아든 시대적 아픔을 비교적 균형잡힌 시각으로 조명하며, 한 가족의 비틀린 순간들을 찾아가는 과정이 설득력 있다.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삽입이나 대역배우들의 장면재연, 이메일 자막삽입 등 사이사이 쓰인 참신한 연출기법도 인상적이다.


캐릭터 구성과 설정 등에선 일견 메릴 스트립과 줄리아 로버츠가 공연한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이 떠올랐으나 그보다 현실적이면서도 따스해서 마음에 들었다. 시대적인 차이 때문인지 심정적인 공감의 정도가 떨어진 점이 아쉽다면 아쉬웠으나 영화를 보기 전과 보고난 후 특정 세대를 바라보는 이해의 폭이 조금이나마 넓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정도면 영화의 가치는 충분하다 하겠다.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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