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과거사 진실규명 가로막힌 10년…진화위 활동 재개돼야[과거사 치유없이 사회통합 없다上]

안태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2.11 18:30

수정 2020.02.11 18:41

형제복지원 사건 아직도 진실규명 요원 
2010년 활동 멈춘 진실화해위윈회 재개돼야
배보상특별법 마련 시급…보상 기준·원칙 확립
[파이낸셜뉴스]
대한민국은 민주화를 쟁취해 내고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만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군사독재 등 현대사의 질곡을 겪으며 생긴 후유증은 현재진행형이다. 일본제국의 손에 이끌려 이역만리 타국에 숨을 거두고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원혼들. 동족상잔의 비극에 휩쓸려 학살당한 민간인들. 해방 이후 권의주의 정부 하에 자행됐던 국가폭력들이 남긴 흔적들이 깉고도 깊다. 현 정부는 이런 점을 감안해 오랜시간 곪아온 과거사 문제의 해결을 위한 철저한 진상규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가 폭력 피해자의 심리치료, 일제강제동원 유해봉환 사업 추진 등이 대표적이다 정부의 과거사 치유 노력의 의미와 성과. 앞으로 과제가 무엇인지 짚어본다.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 대책위 회원 등이 2016년 7월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법' 재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당시 내무부 훈령에 따라 부랑자를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연고가 없는 장애인 등을 부산 사상구 주례동의 복지원에 격리 수용하고 폭행·협박한 사건이다.<div id='ad_body2' class='ad_center'></div> 진상규명법안은 진선미 의원이 19대 국회에서 한 차례 발의했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사진=뉴스1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 대책위 회원 등이 2016년 7월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법' 재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당시 내무부 훈령에 따라 부랑자를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연고가 없는 장애인 등을 부산 사상구 주례동의 복지원에 격리 수용하고 폭행·협박한 사건이다. 진상규명법안은 진선미 의원이 19대 국회에서 한 차례 발의했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사진=뉴스1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자인 최승우씨(51)는 800일이 넘게 국회 앞에서 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14살 때 하굣길에 경찰에게 붙잡혀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간 1982년부터 따지자면 무려 38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이 사건은 당시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일어난 인권 유린 사건이다. 부랑아 선도를 명목으로 멀쩡한 사람들까지 무차별적으로 끌고 가 불법적으로 감금했다. 강제 노역, 폭행, 살인, 성폭행 등이 자행된 끔찍한 사건이었다.

작년에서야 오거돈 부산시장과 문무일 전 검찰총장이 공식 사과했지만 아직도 진상규명의 길은 국회에 막혀있다. 지난 2010년 활동을 멈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의 활동 재개를 담은 과거사정리법 개정안이 아직도 국회서 잠자고 있기 때문이다.

최 씨는 “언론과 시민단체에서 조사를 한 적은 있지만 국가 차원에서 공신력 있는 조사를 실시한 적이 없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국회서 10년째 멈춰버린 과거사 정리
11일 행정안전부 등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출범과 더불어 지난 10년 간 답보상태에 빠졌던 과거사 정리를 국정과제로 추진 중이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여전히 표류하고 있는 상황이다.

핵심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진화위) 활동 재개다. 진화위는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만들어지면서 2006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총 1만1175건의 진상규명 신청을 접수해 4년 2개월 동안 항일운동, 민간인 희생 사건, 인권침해 사건 등을 조사해 총 8450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때 밝혀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희생자만 2만620명에 달한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더이상 진화위 활동이 연장되지 못하고 멈춰버린 것이다. 이제 막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의 진실규명이 불가능한 이유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대표적이다. 숨죽여 지내오던 피해자들은 2012년이 돼서야 국회 1인 시위를 시작했다. 2014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이 사건을 다룬 후 전국적인 이슈로 불거지면서 처음으로 진상규명을 위한 ‘형제복지원특별법’이 마련됐지만 19대 국회에선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이번 20대 국회에선 진화위법에 포함시켜 개정이 논의됐지만 여야 이견 차로 19대 국회의 전철을 밟을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다.

최승우씨는 “진화위 활동이 재개돼야 형제복지원의 실상을 국가가 진상규명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형제복지원뿐만 아니라 여순 사건, 선감학원 사건 등이 주된 진화위 진실규명 대상이다.

■개별특별법 지양…과거사정리법으로 통합 규명
사실 과거사와 관련된 법 제개정안은 앞서 설명한 과거사정리법 뿐만 아니라 이 외에도 200여건이 국회 계류 중이다. 작년말 기준 과거사정리법 등 행안부 소관만 74건, 납북피해자 지원법 등 행안부 이외의 정부부처 소관도 123건에 달한다. 문제는 부처, 정당, 단체들 간 주요쟁점에 대한 이견 차이가 큰 탓에 통과에 난항을 겪고 있어 합의점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한 여건을 감안해 행안부는 진화위 활동재개만을 규정한 과거사정리법개정안을 우선 심사·통과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바 있으나, 이마저도 4차례 법안소위 심사에도 불구하도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이해관계와 쟁점이 혼재돼 있는 과거사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가지 방향 설정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된다.

먼저 진화위의 진실규명 범위에 속하는 사건은 개별사건별 법률 제정을 지양하고 과거사정리법에 따라 진실규명을 추진하는 방안이다. 이를 통해 개별사건마다 설치되는 위원회 운영에 따른 행정적·재정적 낭비와 비효율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 4.3 특별법 초안 마련에 참여하는 등 과거사 문제에 활발하게 참여 중인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이재승 교수는 “5.18 광주민주화 운동, 제주 4.3 사건 등 이미 특별법이 있는 사건들은 지금 방식으로 하고 새로 등장하는 사건은 진화위의 조사 결정을 통해 규명하는 방식이 합리적”이라고 설명했다.

■보상 원칙도 확립해야
‘과거사 배·보상특별법’을 만들어 배·보상 기준을 확립하는 것이 다른 하나다. 개별사건별 법률에 따라 배·보상이 이뤄질 경우 일관된 원칙과 기준을 적용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개별사건 간 피해자 또는 이미 소송을 통해 배상을 받은 피해자와의 형평성 문제도 발생할 수 있어서다.

종전의 진화위 활동에서 진실규명된 희생자를 포함해 제주 4.3사건, 거창사건, 노근리 사건 등의 희생자 3만6000여명이 아직 금전적 보상을 받지 못했다.

행안부 이재관 지방자치분권실장은 “그 동안 수차례에 걸쳐 과거사정리법 개정안에 대한 국회의 논의가 있었지만 최종 통과되지 못해 희생자 및 유족분들께 송구한 마음이다.
20대 국회 마지막까지 과거사법 개정안 통과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eco@fnnews.com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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