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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만에 자세 바꾼 법원... '악당'에서 '영웅'으로 [김성호의 Yo! Run! Check!]

김성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3.14 10:00

수정 2020.03.14 10:00

[김성호의 Yo! Run! Check! 2] 계간 저작권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법의 지배'
[파이낸셜뉴스] '합의금 장사'란 말이 있다. 합의금을 목적으로 고소를 남발하는 법조인과 업체들의 행태를 가리킨다.

'합의금 장사꾼'들한테 애용되는 법 가운데 하나가 저작권법이다. 웹상에 무심코 올린 자료가 저작권법에 저촉될 경우 이를 고소하고 합의를 시도하는 것이다. '귀하의 어떤 행위가 저작권법을 위반해 고소를 진행한다'는 내용증명을 보내 겁을 주고, 연락을 취해 100~500만원의 합의금을 뜯어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음악과 사진 등 저작물성이 인정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장사 밑천으로 쓰일 수 있지만, 최근 2년 간 가장 인기가 높은 건 '폰트'다.
특히 '한글' 프로그램 등에서 폰트를 무심코 사용했다가 소송을 당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피해자는 개인부터 중소기업, 잡지 등 매체, 공공기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전방위적이다.

상황이 어찌나 심각했는지 '저작권 문제 해결 전담반'까지 꾸린 공공기관도 여럿이다. 그중에서도 합의금 장사의 표적이 됐던 전국 시·도교육청이 단연 눈길을 끈다. 어찌나 많은 소송을 당했는지 전국 17개 시·도교육청은 아예 교육부와 함께 '저작권 문제 공동 대응을 위한 TF팀'을 만들어 조직적인 대응에 나섰다.

그 결과 지난달 28일 대법원에서 합의금 장사에 경종을 울리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시교육청과 글꼴제작업체 윤디자인이 벌인 '저작권 침해 손해배상 소송'에서 대법원이 교육청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지난 2001년 대법원이 글꼴 파일을 컴퓨터프로그램으로 인정(99다23246 판결)한 이래 반복돼 왔던 합의금 장사 가능성을 드디어 끊어낸 것이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법의 지배. 논문 별쇄본 표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법의 지배. 논문 별쇄본 표지.


저작권 분야에서 튀어나온 신화 속 악당... 이유는?

이번 '김성호의 요런책'에선 폰트 합의금 장사에 대한 법원의 자세를 분석한 논문을 통해 이번 판결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돌아본다. 논문은 지난해 여름 한국저작권위원회가 발간한 학술지 '계간 저작권 제126호'에 실린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법의 지배'다. 백경태 변호사(법무법인 신원)가 작성했다.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나쁜 놈이다. 나그네를 꾀어 집으로 데려와서는 침대에 눕혀놓고 침대보다 작으면 다리를 찢어 늘리고 크면 다리를 잘라서 죽였다. 그딴 짓을 반복하다 영웅 테세우스한테 잡혀 똑같은 방식으로 죽었다.

끔찍한 악행에도 후대 학자들은 테세우스보다 프로크루스테스를 훨씬 더 사랑했다. '신체훼손인지감수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그니처에 가까운 살해수법이 비유적으로 인용하기에 그만이기 때문이다. 대개 누군가가 세운 일방적인 기준에 다른 이를 억지로 맞춰 평가하는 아집에 가까운 행위를 말할 때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꺼내어지곤 하는 것이다.

백경태 변호사의 논문에서 프로크루스테스에 비유되는 불명예를 안은 건 한국의 법원이다. 앞서 적었듯 대법원이 글꼴 파일을 컴퓨터프로그램으로 봐 저작권성을 인정한 이후, 업체와 법조계의 공통된 이해관계 아래 합의금 장사 시도가 빈번하게 발생했기 때문이다. 소송은 번번이 피해를 주장하는 업체의 승리로 돌아갔고, 그보다 훨씬 많은 경우에 합의금 장사가 성사됐다.

이러한 주리스토크라시는 곧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도 같다. 법원은 자신에게 주어진 맥락과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교조적인 법에 맞추어 사건을 침대에 눕힐 뿐이다. 125p

*주리스토크라시는 입법부에서 사법부로 권력이 넘어가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다. 2004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건이나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당시 종종 쓰였다. 한국에선 '법률가에 의한 지배'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프로크루스테스에서 테세우스까지... 법원의 태세전환

논문에 따르면 한국 법원은 2001년 이후 최근까지 글꼴파일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보아 저작권법에 규정된 '컴퓨터프로그램저작물'로 보호했다. 이는 글자가 지식전달과 정보확산의 매개체로써 보호하지 않을 경우에 사회적 이익이 더 크다는 점을 고려해 개별 글자체에 대한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과 대비되는 판단이다.

결국 글자체가 아닌 글꼴 파일, 즉 폰트의 저작권 침해 주장이 가능해지게 됐다.

전술했듯 업계에선 소송이 빗발쳤다. 특히 몇몇 폰트업체가 온라인상에 파일을 배포한 뒤 이를 활용해 인쇄물을 제작한 업체 및 공공기관에 무차별적 소송을 제기해 논란이 됐다. 이런 사건의 특성 상 정확한 피해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국저작권위원회에 접수된 관련 상담이 매년 폭증해 한 해 1000건을 넘기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글꼴 파일 제작 업체 A사가 지난해(2018년) 6월부터 인천 소재 학교 400여 곳을 대상으로 내용증명 등 손해배상청구 문서를 발송했다. 대규모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은 2016년 8월에 시작한 법정 다툼에서 일부 승소했기 때문이다. A사는 2016년 인천시 교육청과 인천 소재 공립·사립 초등학교 등을 대상으로 저작권 침해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일부 승소한 바 있다. 해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각각 100만 원과 500만 원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129p

논문은 대법원의 이 같은 결정 이전에도 법원이 비슷한 사안들에서 2001년 판결례의 논리를 반복해왔음을 언급한다. 즉 폰트업체의 피해를 인정해 손해배상을 하도록 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법원의 태도가 업계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억지 논리를 반복하는 프로크루스테스적 결정이라고 주장한다.

2013년 정진근 교수가 진행한 '컴퓨터프로그램저작권 관련 규정의 적합성에 대한 인식과 시사점' 연구를 인용해 소프트웨어 업계 전문가 다수가 글꼴파일이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답변을 내놨다는 사실도 언급된다. 해당 연구에선 소프트웨어 감정인 19명 중 15명이 글꼴파일이 프로그램이 아니라고 답해 법원이 고수해온 입장이 업계에서조차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정진근 교수와 백경태 변호사 등 저작권법에 관심을 가진 이들의 연구가 계속되며 학계에서도 법원의 태도가 시대착오적이란 비판이 적지 않게 일었다. 지난달 대법원이 폰트업체의 상고를 기각하고 2심 재판부 결정을 확정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앞서 항소심 재판부는 '한글문서에 글꼴이 사용된 사실 자체만으로는 폰트파일에 대한 복제권과 불법 내려받기 등 저작권 침해로 볼 수 없다'며 업체 측 주장을 배척한 바 있다.


무려 19년 만에 나온 반전으로, 폰트를 활용한 합의금 장사가 크게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대법원이 이들 논문을 참고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제 백 변호사가 법원을 프로크루스테스 대신 그의 목을 벤 테세우스로 바라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법원과 법관이 해야 할 역할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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