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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다락방 올라 기도하던 소녀… 병마 이겨내고 성경을 노래하다 [Guideposts]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08.04 16:56

수정 2020.08.06 16:49

CCM 싱어송라이터 로런 데이글
내가 아프기 시작한 것은 열다섯살 때였다
가족 모두 집을 나서면 있는 힘을 다해
난간을 잡고 다락방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곳은 나만의 비밀공간, 기도하는 성소였다
어느날 거울로 마주한 또다른 로런 데이글
수천명 관객 앞에서 노래하는 나…
이후 서서히 건강을 되찾기 시작했다
대학에 들어가고 오디션 프로에도 나가고
이젠 내가 믿는 것들을 부르는 가수가 됐다
미국을 대표하는 CCM 싱어송라이터로 성장한 로런 데이글은 열다섯살 때 거대세포 바이러스 감염 진단을 받아 2년 넘게 투병 생활을 했다. 그는 "당시 죽음의 공포에서 나를 구원해준 것은 매일 다락방에서 했던 기도 덕분이었다"고 고백했다.
미국을 대표하는 CCM 싱어송라이터로 성장한 로런 데이글은 열다섯살 때 거대세포 바이러스 감염 진단을 받아 2년 넘게 투병 생활을 했다. 그는 "당시 죽음의 공포에서 나를 구원해준 것은 매일 다락방에서 했던 기도 덕분이었다"고 고백했다.
음악으로 성경말씀을 전하는 CCM 싱어송라이터 로런 데이글(오른쪽)은 미국 기독교음악협회에서 수여하는 도브상을 받기도 했다.
음악으로 성경말씀을 전하는 CCM 싱어송라이터 로런 데이글(오른쪽)은 미국 기독교음악협회에서 수여하는 도브상을 받기도 했다.
내가 아프기 시작한 것은 열다섯 살 때였다. 정말 죽을 만큼 아팠다. 처음에는 다들 단핵구증(혈액에 백혈구 숫자가 비정상적으로 많아지는 증상)을 의심했다. 그냥 잠만 자고 싶었다. 어차피 잠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학교도 못 가고, 친구들도 못 만나고 온종일 침대나 소파에 누워 TV만 봤다. 선생님이던 엄마는 하루 종일 집에 안계셨고, 오빠와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일을 그만두고 네 간호에 집중할까 해."

엄마가 말씀하셨다. 나는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종일 잠만 자는데 그걸 보려고 일을 그만두신다고요? 곧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점점 더 악화될 뿐이었다. 리모컨을 들어올려 TV 채널을 돌리는 일조차 힘에 부쳤다. 부모님은 이 의사 저 의사에게 나를 데려갔다. 의사 선생님들은 나에게 끝도 없이 질문을 했고, 온갖 검사를 했다. 그렇게 해서 밝혀진 병명은 거대세포바이러스감염이었다. 단핵구증과 유사하지만 더 위험하고 더 강력한 것으로 간을 비롯한 다른 장기들을 공격하는 병이었다.

병원에서는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것뿐이었다. 느릿느릿 집 안을 돌아다니는 내 모습을 보며,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곳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예전의 나로. 친구들과 전화로 수다를 떨고, 숙제를 하고, 밤늦게까지 잠 안 자고 빈둥거리고, 합창단에서 노래하던 나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그건 사는 게 아니다. 하지만 건강을 되찾은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인데 내 인생이 끝난 것만 같았다. 가슴속에 품은 꿈들이 그저 장난 같았다. 이런 생각이 들자 점점 더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루이지애나주 라파예트에 있는 우리 집에는 다락방이 있었다. 가족 모두 집을 나서면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계단 난간을 잡고 그 다락방을 향해 말 그대로 계단을 기어 올라갔다. 바닥에 베개 몇 개를 깔고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누웠다. 그곳은 나만의 비밀 공간이었다. 기도하는 성소였다. 엄마가 어디선가 할인 중인 기도책을 사오셨다. 제목은 '일 분 찬양(One Minute of Praise)'.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단 일 분.

나는 눈을 감고 다른 사람을 상상하려고 애썼다. 또 다른 로런 데이글을. 당당하고 활기 넘치며 자신감에 차 있던 소녀. 노래를 곧잘 하던 소녀. 겨우 세 살밖에 되지 않은 나에게 교회 음악감독 선생님이 크리스마스 연극에서 낙타 역을 해보라고 하신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내가 불러야 할 부분의 악보를 건네셨다. 거기에는 '독주'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이건 혼자 불러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렇단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두세 소절뿐이었지만 노래를 부르는 순간 생각했다. '영원히 노래만 하고 싶어.'

엄마는 나를 꼬마 음악상자라고 부르셨다. 나는 집 안을 돌아다니며 휘트니 휴스턴이나 셀린 디옹을 흉내내곤 했다.

루이지애나 지역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 나는 흙이 빗물과 섞여 진흙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마치 초콜릿우유 같았다. 그 순간 머릿속이 빨라지면서 시구가 번득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종이에 옮겨 적고 어울리는 그림도 그려 넣었다.

"책으로도 만들 수 있겠는데?"

엄마가 말씀하셨다. 내가 크레파스와 매직펜으로 그림을 완성하자 엄마는 낱장의 종이들을 스테이플러로 고정하는 방법을 알려 주셨다. 엄마와 나는 나란히 앉아 내가 완성한 시를 큰 소리로 낭독했다. 내가 시를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시를 노래로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때의 에너지, 그때의 경이로움은 이제 내 안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나만의 성소에 누워 있었다.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바닥이 따뜻했다. 이 햇살은 왜 나를 관통하지 못하는 거지? 내 병을 왜 고쳐 주지 못하는 거지?

"주님, 저에게 무슨 가르침을 주려고 이러시는 건가요? 이제 저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죠?"

나는 물었다. 나중에 무슨 일들을 할 것인지 다 생각해 놓았는데. 선교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도 하고 싶고, 의료 분야로 진출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도 싶었다. 이제는 내가 아픈 사람이 되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엄마가 사주신 그 5달러짜리 기도책을 읽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계단을 한 칸씩 올라갈 때마다 멈춰 서서 숨을 골라야 하는 힘든 여정이었지만 나는 매일같이 다락방을 찾았다.

어느 날, 욕실의 거울 앞에 서서 잠옷 차림의 창백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양치질을 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그 사람은 또 다른 로런 데이글이었다. 지금의 내 모습이라고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아주 생생하고 현실적인 모습의 로런 데이글이었다. 헛것을 본 걸까? 아니다. 마치 하나님이 내려주신 것처럼 느껴졌다.

야외 경기장에서 수천 명의 관객 앞에서 노래하는 소녀가 보였다. 투어버스에 오르고 내리는 모습도 보였다. 직접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모습 그리고 녹음을 위해 스튜디오로 들어가는 소녀의 모습도 보였다.

그날 이후로 그 이미지는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녔다. 마치 머릿속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것 같았다. 병이 앗아가 버렸다고 생각한 꿈. 이런 단어들이 떠올랐다.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것은 바로 내 기도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라고. 주께서는 나에게 약속을 하셨다. 그래, 난 좋아질 거야. 그 전에 아픔을 먼저 주신 것뿐이야. 그래, 곧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겠지. 이 고독의 시간, 이 끔찍한 고립감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서서히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거의 2년을 앓았는데, 의사 선생님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다. 건강이 회복되자 집에서 6개월 동안 공부한 끝에 차터 스쿨(정부의 공적자금을 받지만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학교)을 졸업할 수 있었다. 선교사로 브라질에도 갔다. 꿈 하나가 이뤄진 셈이다. 그리고 루이지애나 주립대학에 들어갔다.

거기서 대학 합창단원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노래를 부르며 느꼈던 희열을 고스란히 되찾았다. 오디션 프로그램 '아메리칸 아이돌'에도 참가했다. 조명, 카메라, 액션? 관객 앞에서 노래하는 나에게 모든 조명이 집중되었다. 두 시즌 동안 꽤 잘해 나가다가 마지막 순간에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에겐 다른 길이 있으니까.

나는 온갖 장르의 음악을 듣고 자랐다. 아빠는 정통 록음악 애호가로 레드 제플린의 광팬이었다. 장거리 운전을 하실 때면 아빠는 우리와 게임을 하곤 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수를 우리가 맞히면 아빠가 1달러씩 주는 게임이었다. 엄마는 재즈와 흘러간 대중가요를 좋아했다. 나는 토니 베넷을 무척 좋아했지만 그만큼 아델도 좋아했다. 하지만 '아메리칸 아이돌'에서 공연을 한 이후로 직접 노래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내가 믿는 것들에 대해 노래하고 싶었다. 진실한 것. 성스러운 것. 이런 것들이 내가 거울에서 봤던 것 아닌가?

나에게 기회의 문이 활짝 열렸다. 점점 더 큰 장소에서 공연이 이어졌고 내가 작곡한 노래를 녹음할 기회도 생겼다. 2015년 첫 정규 앨범이 발매됐고 이듬해에는 2집이 나왔다. '도브상'(미국 복음음악협회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았고, '그래미상'에서는 여러 부문의 후보에 올랐다. 평론가들은 나를 에이미 그랜트(미국을 대표하는 기독교음악가)와 비교하곤 했다.

하지만 그 아픔의 2년을 가치 있게 만든 것은 찬사도 성공도 아니다.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성공은 빨리 찾아온 만큼 빨리 사라질 수도 있다. 고통은 우리 삶의 일부다.
다락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었던 그 시간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그의 존재를 나에게 알리시고, 그 앎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 것에 있었다.

글·사진=가이드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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