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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체트 헌법 끌어내린 칠레 민중에 박수를 보내며 [김성호의 요런책]

김성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2.11 13:16

수정 2021.02.11 13:16

[김성호의 Yo!Run!Check! 9]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
[파이낸셜뉴스] 시대의 죄인이 있다. 역사의 준엄한 명령을 거역하고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짓거리를 일삼은 자들이다. 이들로 인해 마땅히 누렸어야 마땅한 많은 가치가 꺾이고 부러져 제 꽃을 피우지 못했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고, 매를 맞고, 숨어서 눈물짓던, 수많은 아까운 생명들을 보라.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부조리도 상당부분은 이런 죄인들이 저지른 과오로부터 비롯됐다.

일제강점기와 반민주정권의 지도자와 부역자들은 단죄돼 마땅하다. 단순히 민중들의 화를 푸는 데 그치지 않고, 새 시대의 가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죄를 묻고 처단해야만 한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와해되고,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가 볼품없는 성과만 남긴 채 문을 닫는 모습, 촛불혁명에도 불구하고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고전하는 모습은 이 시대와 나라의 맨 얼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하다하다 사면론까지 고개를 쳐드는 오늘이다. 친일과 군부독재의 죄인을 제대로 단죄하지 못한 죄과로 또 다른 괴물들이 탄생했다. 그 죄가 남아 다시 또 이들을 사면하자는 논의가 정계 중심에서 불기 시작한다. 나라의 기틀이 바로 섰다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 칠레의 밤 책 표지 ⓒ 열린책들
▲ 칠레의 밤 책 표지 ⓒ 열린책들

한국과 닮은 칠레 역사, 그들의 단죄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한다. 다만 반드시 복수가 이뤄져야 군자의 삶이다. 여기 라틴문학계의 군자가 있다. 시대의 죄인들을 소설의 중심에 일으켜 세워 그 심장에 칼을 꽂고 가죽을 벗겨 아주 박제를 해 놓는다. 가브리엘 마르케스 이후 남미문학의 정점에 섰다고 평가받는 칠레의 문호 로베르토 볼라뇨다.

칠레는 여러모로 한국과 닮아 있다. 스페인으로부터 식민지배를 겪었고, 독립 후 남아메리카에서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미국에게도 적잖은 간섭을 받았다. 민주투표로 창출된 아옌데 정권을 피노체트 군부가 전복하고 16년에 걸친 독재를 했다. 이 기간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목숨을 잃은 이들이 부지기수다.

혁명으로 마침내 민주정권이 들어섰지만 피노체트 정권에 대한 향수는 여전하다. 주변국에 비해 경제적 성과가 있었고 진보와 보수를 첨예하게 갈라놓은 정치공작도 효과를 봤기 때문이다. 이후 들어선 칠레 민주정부는 낮은 지지율과 정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19년과 2020년엔 칠레 전역에서 뜨거운 시위가 있었다. 지하철 요금 단 50원(약 30페소) 인상을 기화로 폭발한 칠레인들의 민중시위는 지난해 피노체트 헌법을 뜯어내기에 이르렀다. 무려 40여년 만에 거둔 성취다. 칠레인들은 죄인의 인장을 뜯어낸 자리에 자유와 인권을 새로 쓰겠다 말한다. 1818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뒤 무려 200여 년 동안이나 지연돼 온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식민지배와 독재정권의 폭압 가운데서도 칠레인이 이 같은 성취를 이룬 데는 로베르토 볼라뇨와 같은 작가의 기여도 있을 것이다. 암담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을 성찰하고, 그저 순응하기만 하는 모든 것에 신랄한 지적을 서슴지 않는 삶을 살았다. 때로는 파블로 네루다, 호소 도노소, 이사벨 아옌데, 가브리엘 마르케스 같은 존경받는 거인들도 그의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로베르토 볼라뇨. fnDB
로베르토 볼라뇨. fnDB

시대의 죄인을 불러다 소설 위에 세우다

<칠레의 밤>은 볼라뇨가 2000년 탈고한 소설이다. 암담했던 시기, 종교와 문단의 장막 뒤에 숨어 부조리에 부역한 이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단죄한다.

주인공은 이바카체는 카톨릭 사제이자 작가이고 평론가다. 자신의 인간적 결함을 카톨릭 신부복 뒤에 감추고 '오푸스데이'란 단체에 속해 반동주의자들을 옹호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되던 시기, 집 안에 틀어박혀 그리스 고전에 빠져 살고 피노체트 정권이 들어서자 피노체트를 포함한 군사평의회 최고위원들에게 마르크스주의를 강연한다. 이른바 '적을 알고 더 잘 공격하기 위한' 교육이다.

이바카체는 소설의 다른 많은 이들처럼 실존인물을 모티프로 삼았다고 한다. 호세 미겔 이바녜스 랑글루아라는 인물로, 필명은 이그나시오 발렌테다. 실제 오푸스데이 신부이자 문학평론가로, 피노체트 시절 문단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피노체트에게 마르크스 강의를 했다는 건 정설이고 발렌테가 그 강의를 했다는 이야기도 신빙성이 있다고 한다.

소설은 임종을 앞두고 침상에 누운 이바카체의 회상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바카체가 자주 찾았던 문학도 마리아 카날레스의 저택에 대한 기억으로 채워진다. 마리아 역시 이바카체 못잖은 사연이 있다. 그녀는 부유한 미국인 남편과 결혼해 대저택에서 유유자적 살았다. 수시로 예술가를 초청해 파티를 벌였다.

그러다 한 장면, 파티장에서 한 손님이 화장실을 찾다 길을 잃는다. 그가 마주한 건 저택 지하실 어느 방의 참혹한 풍경이었던가.

칠레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지난 2006년 사망했다. 칠레에선 피노체트 독재 과오를 청산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fnDB
칠레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지난 2006년 사망했다. 칠레에선 피노체트 독재 과오를 청산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fnDB

우리도 단죄하고 결딴내지 못한 게 남았는데

카날레스의 남편 지미 톰슨은 후에 CIA 비밀요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는 매일 칠레 정치범을 잡아다 지하실에 가두고 고문을 자행했다. 카날레스는 남편이 세실리아 산체스 포블레테라는 사람을 죽였고, 남편의 부하가 스페인 유네스코 직원을 죽였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녀는 대부분 정확한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저 가끔 전기가 나갔다가 돌아오면 아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하고 짐작하는 정도였다.

이 역시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마이클 타운리라는 CIA 요원이 마리아나 카예하스와 결혼해 살았다. 이 집에선 자주 예술가들이 참석하는 파티가 열렸고, 같은 시기 지하실에선 UN산하 라틴아메리카 경제위원회 직원 카르멜로 소리아가 고문을 받다 숨졌다.

볼라뇨의 상상력이 특히 인상적인 건 카날레스를 문학도로 꾸미고, 그녀가 뻔뻔하게도 정말 어떤 문학을 추구하는 양 묘사하는 대목이다. 이바카체 역시 제 성공이 피노체트 정권에 대한 부역이 아닌 진실로 어떤 이성적인 위대함을 성취한 결과라고 믿는다. 이들이 맞이하는 비참한 결말은 그 시절 실제 존재했던 칠레 문학과 예술에 대한 적나라한 평가이고 단죄다.

<칠레의 밤>은 피노체트와 톰슨이 아닌 이바카체와 카날레스를 중심에 세웠다는 점에서 특히 눈여겨 볼만하다. 피노체트와 톰슨의 비극적 결말에도 수많은 이바카체와 카날레스가 죄책 없이 살아 있음을 일깨우고 그에 마땅한 처분을 내리려는 것이다.

군부독재정권이 만든 헌법을 뜯어고치기로 결의한 칠레인들과 반민특위 와해 이후 제정된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살아 있는 한국의 오늘을 번갈아 바라본다. 볼라뇨가 오늘 한국에 살았다면 어떤 글을 써내려갔을까.

<칠레의 밤>으로부터 이승만과 박정희와 전두환, 다시 이명박과 박근혜를 넘어 아직 단죄하고 결딴내지 못한 것들이 아주 많이 남아 있음을 깨닫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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