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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 이후 4년, 한국은 충분히 진보했을까 [김성호의 요런책]

김성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2.13 09:16

수정 2021.02.13 09:16

[김성호의 Yo!Run!Check! 10] 진중권,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파이낸셜뉴스] 촛불혁명이라고 했다.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웠던 시민들의 열망이 용인될 수 없는 죄를 범한 대통령을 끌어내렸다. 장미대선이라 불린 선거가 있었고, 21세기 들어 최고 투표율을 기록한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다. 과정과 결과 모두 민주적이었다.

그로부터 4년이 흘렀다. 오늘 한국은 어떤가. 코로나19 확산이란 유례없는 재난을 감안하더라도 기대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지 않은지, 가끔은 참담한 마음을 억누를 길 없다.


4년 전 광장에 나온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월호 침몰참사 유족이 청와대 앞에서 단식을 하고 삭발을 하는 모습을, 복직을 요구하며 청와대 앞에서 단식하는 이들이 혹한 속에서 침낭과 보온물품을 빼앗기는 일을 말이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정부의 비협조로 충분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지금도 외주 노동자들이 죽어나가고 있지만 기업 책임을 묻는 법률은 산재 사망자 비율이 가장 높은 5인 미만 사업장이 적용대상에서 제외된 반쪽짜리로 통과됐다. 관련 논의를 이끈 고 김용균씨 모친 김미숙씨는 여당이 180석을 확보한 국회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4년 전 광장에 모인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2021년 한국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리라 내다보지 못했으리라.

▲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책 표지 ⓒ 천년의상상
▲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책 표지 ⓒ 천년의상상

진중권의 날 선 비판, 귀담아 들어야 진보다

여기 귀담아 들을만한 진단 하나가 있다. 언제나 논란을 몰고 다니는 논객 진중권씨의 책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집중 비판해 이른바 ‘조국 흑서’라고 불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강양구 기자, 김경율 회계사, 권경애 변호사,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등과 함께 낸지 석달에 발표한 책이다.

책은 문재인 정권과 진보진영, 한국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조 전 장관 문제부터 코로나19 방역과 한국 종교, 윤미향 의원과 정대협, 고 박원순 서울시장 등의 사례가 언급된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개인주의 등의 가치가 서로 겹치고 맞닿으며 왜곡되기도 하는 순간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조명해 다시금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남산 ‘기억의 터’ 조형물에 새겨진 247명 위안부 피해자 명단에 심미자 운동가의 이름은 빠져 있다. 할머니는 정대협을 향해 “당신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역사의 무대에 앵벌이로 팔아 배를 불려온 악당”이라 말한 바 있다. 2008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8년 후 조형물이 세워질 것을 예견하고 ‘내 이름을 빼달라’라고 했을 리는 만무할 터. 왜 심 운동가의 이름이 빠졌는지는 정의연만이 안다. -177p

현재하는 문제에 대한 진중권의 해석은 대체로 흥미롭다. 가치에 대한 동의가 아닌 일방적 애착으로 비롯된 팬덤이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비판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는 지적부터, 양정숙 의원은 제명하고도 윤미향 의원은 지키려는 여당의 태도를 어느덧 주류가 된 운동권 서사로 풀이하는 대목 등 유효한 부분이 적지 않다.

과거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과 현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을 비교해 ‘철학이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한 대목은 지지자들에게도 생각해볼 거리를 던진다. 그에 대한 비판 이후 연설문을 고치는 대통령 사진으로 반박했다는 청와대의 대응도 흥미롭다.

박식한 학자답게 역사 속 여러 순간을 지면 위로 불러와 한국 현실에 대입해 소개하는 대목은 진중권의 책이 아니고선 만나기 쉽지 않은 것들이다. 나치 철학자로 불리는 카를 슈미트를 오늘의 민주당에 가져다 댄 건 지나친 해석처럼 보이지만, 이해찬 전 대표의 함구령과 금태섭 의원 징계 건 등에서 보여진 전체주의적 면모를 지적한 부분은 유효한 울림이 있다.

지금도 하루에 두 명씩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죽어 나간다. 하지만 이들을 지켜주는 일은 어느 보수 문인에게 맡겨놓고, 진보의 노멘클라투라로 변신한 그들은 사회 곳곳에 기득권의 망을 구축해놓고 서로 부패할 권리를 지켜주느라 여념이 없다. 한때 노동해방을 외치던 노동자들도 지금은 자본가와 손잡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피와 땀을 빤다. 그들이 ‘열사’로 시성해 모란공원에 모신 무덤 중 일부는 관리비마저 밀려 있다. -213p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에 대한 수사 이후 문재인 정부를 강력히 비판해온 진중권씨. fnDB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에 대한 수사 이후 문재인 정부를 강력히 비판해온 진중권씨. fnDB

'아니다' 말할 사람, 한 명쯤 있어야

다만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곳곳에서 가볍게만 언급하고 지나가는 검찰에 대한 언급을 보다 전면적으로 다뤘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아쉬움이다. 저자가 집중적으로 비판한 사례 중 상당수가 검찰 개혁이란 과제와 나누어 생각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에 대한 진단을 피하지 않았다면 더욱 솔직하고 의미 있는 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는 충분히 의미 있는 물음을 던진다. 이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이가 아주 오랫동안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논객으로서 진보와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이들과 싸워왔음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진중권이 지난 시간 받아낸 공격 가운데 아주 많은 부분이 지나치고 불합리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다원주의다. 합의된 원칙을 지키며 서로 다른 생각이 공존할 수 있어야만 건강한 민주주의가 자리할 수 있다. 이러한 신념이 진영을 넘어 내재돼야만 건강한 토의와 타협이 가능하다. 이 책은 쏟아지는 비난에도 여전히 그 신념에 기대어 반대자에게 손을 내민다.

선동과 포퓰리즘이 정치판을 휩쓸고 정작 지켜져야 할 가치들이 거리에서 찬바람을 맞는 오늘, 그 이유를 찾는 이들에게 나는 이 책을 일독하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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