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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이 회사, 왜 '허구'라 해야하나 [김성호의 영화가난다]

김성호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2.13 15:16

수정 2021.02.13 15:15

[김성호의 영화가난다 31]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파이낸셜뉴스] 한국인이면 모두 아는 회사 이야기다. 체신부 산하기관으로 출발해 공기업으로 독립 후 2002년 민영화돼 굴지의 통신사로 자리 잡은 회사다. 전국 방방곡곡에 통신망을 구축했고, 2G부터 5G까지 온라인 통신과 사물인터넷 시대에 발맞춘 각종 서비스를 선도하며 정보통신 강국 한국의 오늘에 상당히 기여했다.

물론 빛만 있는 건 아니다. 누구보다 개인정보 관리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통신사임에도 소홀한 관리로 수천 만 명의 개인정보를 유출해 논란을 빚었다. 자유한국당 전 의원 등 유력인사 자녀를 부정채용해 대표가 실형을 받기도 했다.


민영화 이후 반인권적으로 직원들을 강제퇴출시켜온 사실도 문제가 됐다. 관련돼 언론에 보도된 사실만 추려도 다음과 같다.

민영화 직후부터 2003년까지 5505명을 퇴출시켰다. 2009년 12월엔 5992명이 퇴출됐다. 그때마다 단일기업 국내 직원 퇴출기록을 다시 썼다. 형식은 명예퇴직이고 징계해고였으나 사실상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정리해고였다.

▲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포스터 ⓒ 영화사 진진
▲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포스터 ⓒ 영화사 진진

보는 내내 이 회사가 떠올랐다

문제는 본사 차원에서 직원을 해고시켰다는 의혹이 있다는 점이다. 2011년 공개된 ‘부진인력(C-Player·CP) 관리 프로그램’ 대상자 1002명 명단엔 사번과 직무, 명퇴요건 대상여부, 노조활동 가담정도 등이 기록돼 있었다. 2005년 작성된 문서로, 당시 공익제보자는 그때까지도 본사 차원에서 이를 관리하고 있다고 증언했다고 보도됐다.

당시 노조는 본사가 직원들을 아웃소싱해 자회사로 퇴출시키고 이에 따르지 않는 직원들에게 불이익을 줬다고 주장했다. 그중에선 서울에서 충청북도로 발령이 나 전신주를 오르다 추락해 반신불수가 된 사례, 콜센터 여성노동자가 대구에서 경북 각지와 울릉도까지 전전하며 전신주 오르기, 풀매기를 강요받은 사례도 있었다. 울릉도까지 가서 전봇대를 올라야 했던 콜센터 노동자는 법원에서 부당해고 판정까지 받았다고 한다.

전임자에 이어 취임한 다음 회장도 8304명 구조조정과 명퇴 거부자에 대한 불이익조치로 논란을 빚었다.

더 적을 수 있는 문제도 많지만 이 글에 꼭 필요한 내용은 여기까지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보는 내내 실재하는 회사가 떠오른다. 영화 시작과 함께 ‘본 영화는 사실을 모티프로 창작하였으나 공간, 배경, 소재, 인물, 지명, 회사 및 일체 명칭은 허구임을 밝힌다’는 자막이 뜸에도 곳곳에선 이 회사가 떠오르는 설정이 가득하다.

오해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여기 영화 내용을 좀 적어본다.

▲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 영화사 진진
▲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 영화사 진진

하청업체 파견돼 송전탑 오른 본청 여직원

본사 대리 박정은(유다인 분)이 지역 하청업체로 파견된다. 하청업체에서 1년을 버티면 다시 본사로 발령내주겠다는 조건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도착하고 보니 누가 봐도 낙후된 시설에 제가 할 일도 마땅치 않다. 하청업체가 하는 일은 송전탑 보수관리다. 장비를 차고 30m가 넘는 송전탑에 올라야 하니 여자 몸으로 해내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정은은 사무직으로 입사한 본청 정직원이다.

영화는 서서히 본색을 드러낸다. 본사 정은의 책상은 벽을 마주하고 있다. 권고사직을 거부하던 친한 언니는 영정사진으로 등장한다. 정은이 떠난 자리는 정은의 여자 동기가 이어받는다.

하청업체 사장은 난처하다. 본사 직원이 전화해 “그거 하나 쫓아내기가 그렇게 어렵냐”고 윽박지른다. “다른 곳은 잘만 하던데”라며 “못하면 내년 계약도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 영화사 진진
▲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 영화사 진진

없는 자들끼리 물고 뜯는 세상

하청업체엔 당장 날벼락이 떨어진다. 내년부턴 파견직원 임금도 하청업체가 부담하란 지시다. 박 대리 월급까지 지급하려면 빠듯한 사정에 직원 하나를 해고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 소식에 당장 위협받는 건 막내(오정세 분)다. 다른 두 직원보다 늦게 들어왔고 편의점이다 대리운전이다 바쁘게 살다보니 근무평정도 좋지 않다. 직원 해고를 하청업체에 떠넘긴 본사방침에 막내와 박 대리의 불편한 공존이 시작된다.

박 대리는 천덕꾸러기일 수밖에 없다. 혼자 여자인데다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으니까. 무거운 장비를 들지도 못하고 기본적인 지식도 전무하다.

제풀에 꺾여 나가떨어질 만도 한데, 박 대리는 어떻게든 꾸역꾸역 버틴다. 두려움을 딛고 저 높은 송전탑에 오르고, 할 줄 몰랐던 수리도 조금씩 배워나간다. 제가 나가주길 바라는 막내에게 “해고나 죽는 거나 뭐가 다르냐”고 말하는 박 대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울릉도까지 가서 전봇대에 올랐던 콜센터 여직원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 영화사 진진
▲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 영화사 진진

사실이지만 '사실' 아니라는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끝끝내 어느 실화를 배경으로 했는지, 누구를 비판하고자 하는지를 밝히지 않는다. 신랄한 비판과 집요한 책임추궁 대신, 실재하는 여러 문제를 건드리고 예고된 결말로 나아가 끝을 맺는다. 다소 신파적이고 조금은 감동적인, 다분히 현실성 없는 그런 결말이 이 영화의 무력한 도착지다.

못잖게 아쉬운 건 여러모로 단순한 모티프를 넘어서 있는 배경이 짐작됨에도 이를 드러내지 않은 영화의 선택이다. 분명 처음이 아니다. 차라리 전통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누가 봐도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 노동자 이야기를 다룬 <또 하나의 약속>은 기업명은커녕 대표 광고카피인 ‘또 하나의 가족’조차 그대로 쓰지 않았다.

2007년 이랜드 홈에버 사태를 다룬 <카트>도 마찬가지다. 극중 마트 이름은 ‘더 마트’로 사실상 익명 처리된다. 누구도 이랜드그룹과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점 노동자들의 이야기라고 입밖에 꺼내어 말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실화를 단순 모티프 삼은 <베테랑> 같은 영화가 실명을 쓰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SK그룹 창업주 최종현 전 회장의 조카로 물류업체 M&M을 경영한 최철원 대표가 SK본사 앞에서 1인시위를 하던 탱크로리 기사 유모씨를 사무실로 불러 야구방망이로 폭행한 사건은 그저 영화 밖에서만 언급될 뿐이다. 폭행 후 한 대 당 100만원씩 맷값 2000만원을 줬다는 최 대표와 <베테랑> 속 인물은 얼마나 닮아있나.

노무현 대통령의 이야기를 다룬 <변호인>, MBC PD수첩의 줄기세포 조작사건 보도를 다룬 <제보자>도 마찬가지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는 자막 뒤에 숨어서야 조용히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

▲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 영화사 진진
▲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 영화사 진진

할리우드가 위대한 건 기술만이 아니다

할리우드는 그저 기술만 앞서있는 게 아니다. 불행히도 영화인의 정신과 그를 뒷받침하는 시민의식, 나아가 문화까지 모두가 훨씬 더 앞서있다.

지난해 개봉한 <다크 워터스>는 글로벌 화학기업 듀폰(DuPont)의 독성 폐기물질 유출실화를 다뤘다. 듀폰은 영화 속에서도 듀폰이다. 언론영화 <스포트라이트> <트루스> 속 언론은 부정적으로 다뤄질 때 조차도 사명 그대로 등장한다. <빅쇼트>는 금융기관과 신용평가기관은 물론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도 실명으로 등장시킨다.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되는 <캡틴 필립스> 속 세계최대 컨테이너 선사 머스크, <에린 브로코비치> 속 중금속 유출 대기업 PG&E도 모두 실명 그대로 나온다.

이달 개봉한 스웨덴 영화 <438일> 속 룬딘(Lundin Petroleum) 역시 실제 글로벌 석유회사다. 영화는 이 업체가 에티오피아 정부의 독재와 폭력에 어떤 부정적 영향을 미쳤으리란 강한 의심과 그 뒤에 스웨덴 권력자가 있다는 법적으로 확정되지 않은 의혹을 당당히 제기한다.

▲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 영화사 진진
▲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스틸컷 ⓒ 영화사 진진

기업 이름 썼다면 어떤 문제 생길까

영화계 사건을 주로 맡는다는 곽호성 변호사(법무법인 신원)는 “영화제작 관행상 사전에 회사 동의를 받는 편이 일반적이지만 설령 동의를 받지 않더라도 이를 두고 상표권 침해나 부정경쟁행위, 불법행위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면서도 “단순히 짧게 노출되는 정도를 넘어서 등장인물 또는 장면의 내용과 결부돼 관객에게 부정적 인상을 갖게 할 정도라면 회사의 동의가 없는 이상 손해배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곽 변호사는 “‘법인의 명예나 신용을 훼손하는 행위에는 법인의 목적사업 수행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법인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일체의 행위가 포함된다’는 판례가 있다”며 “('사실과 관련 없다'는 자막을 넣는 건) 영화의 특정 장면이 사람이나 법인의 명예와 인격권을 침해했는지를 판단할 때 일반 관객이나 시청자의 인식도 기준이 되므로, 영화의 내용이 허구란 걸 주지시키려는 이유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한국에선 손해배상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뜻이다.

한국 영화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할리우드와 유럽 영화인들이 해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는 나에겐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법이 아닌 문화가 이런 차이를 만들어냈다는 건 안타까움을 넘어 치욕스럽기까지 하다.


우리는 더 당당해져야 한다.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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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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