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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 이준익 감독 "결국 버티는 게 인생이다" [인터뷰]

신진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3.25 16:06

수정 2021.03.25 16:06

이준익 감독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이준익 감독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역사는, 현재를 투영하거나 반영하는 것이다. 현재를 반영하지 않을 거면 사극을 왜 찍어야 하나? 과거의 이야기가 현재와 맞닿는지가 중요하다.”(이준익 감독)

‘왕의 남자’(2005년)로 1000만 관객을 모은 이준익 감독이 다시 사극 ‘자산어보’로 돌아왔다. ‘황산벌’(2003년), ‘사도’(2015년), ‘동주’(2016년), ‘박열’(2017년) 등 역사 속 사건이나 인물을 새롭게 조명해온 이 감독은 신작에서도 자신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필모그래피의 정점을 찍는다. 특히 ‘동주’에 이어 흑백으로 완성한 이 영화는 한 폭의 동양화처럼 미장센이 수려하고 흑산도 민초들의 삶은 생동감이 넘친다.

영화 '자산어보'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영화 '자산어보'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왜 정약전과 ‘자산어보’였을까?

이 감독은 앞서 ‘동주’에서 윤동주보다 그의 사촌인 송몽규의 삶을 중점적으로 다뤄 감춰진 인물 송몽규를 발견하고, 윤동주를 재조명했다.
‘자산어보’에서는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지정된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개혁가인 정약용(1762~1836)보다 그의 형인 정약전(1758~1816)에 주목한다. 또 정약전이 집필한 ‘자산어보’ 서문에 언급된 실존 인물 장덕순(창대)의 삶을 상상력으로 빚어냈다.

정약전(설경구 분)은 천주교도 박해사건인 신유박해로 형제, 가족과 생이별한 뒤 흑산도로 유배되나, 그곳 섬마을 청년 창대(변요한 분)를 통해 바닷가 생물에 눈을 뜨면서 민중의 삶을 위한 실용서적이자 어류학서인 '자산어보'를 집필하기로 마음먹는다. 영화는 성리학을 맹신하고, 서학을 배척하던 창대와 정약전이 서로의 벗이자 스승이 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펼친다. 정약용이 실제 지은 한시 등을 곳곳에 배치하고, 어물장수 문순득의 표류 경험기 ‘표해시말’ 창작 비화를 일화로 녹이는 등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유기적으로 결합돼 영화적 재미와 깊이를 더한다.

자칭 ‘역사 덕후’인 이 감독은 정약용보다 ‘덜 유명한’ 정약전에 주목한 이유로 “개인주의 시대”를 언급했다. “국가주의나 집단주의의 시대는 저물고 이젠 개인주의 시대다. 망원경이 아니라 현미경으로 역사를 들여다봐야 하는 시대라 영화도 거대한 사건이나 영웅의 이야기를 다루기보다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일상을 가깝게 볼 필요성을 느꼈다.” 목민관, 즉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과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아니라 정약전의 ‘자산어보’ 집필 과정을 다룬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공동의 선을 추구한 ‘목민심서’처럼 ‘자산어보’도 실사구시에 입각해 모두의 이익을 위해 쓴 것이다. 하지만 국가주의나 공동체주의에 대한 강박 없이 오로지 개인의 관찰 기록이라는 점이 다르다. 관찰의 주체는 정약전이나 그걸 가능하게 한 사람은 창대다. 창대는 우리가 찾아내야 할 우리의 모습이다.”

창대는 뛰어난 어부지만 어부로 살기보다 출세해 좋은 관료가 되길 꿈꾼다. 양반 아버지를 둔 상놈의 신분으로 신분상승을 꿈꾼다는 점에서 보통사람을 대변하는 동시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던 당시 시대 분위기가 투영된 캐릭터다. 이 감독은 “지금도 신분상승을 위해 공부한다"고 지적했다. "창대는 ‘자산어보’가 아니라 ‘목민심서’의 길을 가려하고 그 길에 가까워지나, 우리 모두가 경험했듯 교육기관에서 배운 것과 거리가 있는 실제 사회생활을 만난다.” 창대를 연기한 배우 변요한 역시 창대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을 봤다. “창대는 (미래를 향한) 갈증과 뜨거움이 있지만 넘어야 할 벽이 많다는 점에서 나와 닮았다고 느꼈다. 나아가 세상 모든 젊은이, 모든 사람과 닮았기에 창대가 곧 우리 모두라고 생각하며 연기했다.”

이준익 감독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이준익 감독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시대 속으로 풍덩” 흑백의 미학

‘자산어보’에서 인상적인 순간 중 하나는 정약전이 탄 나룻배가 흑산도 앞바다에 도착했을 때다. 주민들의 각양각색 얼굴이 카메라에 잡힌 순간, 마치 과거로 시간여행을 간 기분이 든다. 이 감독은 “흑백은 과거고 컬러는 현재의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 반대"라고 말했다. "요즘 사람에겐 오히려 컬러가 현실이고 흑백이 판타지다. 컬러영화는 마치 과거의 인물을 현재로 소환한 것 같다면, 흑백은 내가 그 과거의 인물에게 다가간 것 같다.”

흑백으로 찍었기에 제작비를 아꼈을 뿐만 아니라 대자연의 풍광을 더욱 유려하게 담아낼 수 있었다. 이 감독은 “흑백영화는 컬러보다 더 쉬우면서도 더 어렵다"고 했다. "이야기가 선명하게 부각되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이야기가 분명하지 않으면 금방 들통이 난다. 또 시각 정보가 적다보니 카메라에 담기는 모든 것, 배경부터 소품, 배우들의 연기까지 여백이 많다.”

‘자산어보’에는 컬러로 찍었다면 결코 담지 못할 사이즈의 ‘익스트림 롱샷’이 많다. 이 감독은 “약전이 ‘자산어보’를 집필하기로 마음먹고 창대에게 달려가는 해변 신"을 언급했다. "약전이 스크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참을 달려간다. 그때 하늘 위엔 새털구름이 떠 있다. 컬러였으면 하늘과 바다와 인물을 그렇게 폭넓게 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인물보다 풍경에 더 눈길이 갔을 것이다.” 정약전을 연기한 설경구는 “영화를 찍으면서 절경에 감탄한 적이 많다”고 회고했다. 이는 관객 역시 마찬가지로, 영화가 끝난 뒤에서 몇몇 장면은 마치 한국화의 거장이 그린 한 폭의 수묵화처럼 계속 아른거린다. 정약전이 거주하는 가거댁(이정은 분)의 초가집 세트는 탁 트인 바다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흑산도 근방의 도초도 절벽 위에 설치했는데, 이곳에서 바라본 풍경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거칠게 일렁이는 파도는 마치 한치 앞을 모르는 우리네 인생을 떠올리게 한다.

왼쪽부터 창대 역의 변요한, 정약전 역의 설경구, 가거댁 역의 이정은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왼쪽부터 창대 역의 변요한, 정약전 역의 설경구, 가거댁 역의 이정은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우리가 사는 지금을 돌이켜볼 만한 교훈 담아

‘자산어보’에는 촌철살인의 귀재로 알려진 이 감독의 영화답게 가슴에 와닿는 명대사도 많다.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는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대사부터 “외울 줄밖에 모르는 공부가 나라를 망쳤다”라든지 “학처럼 사는 것도 좋지만, 검은색 무명천으로 사는 것도 뜻이 있지 않을까” “씨만 중허고 밭 귀한 줄은 모르는 거 말이여랴” 등의 뼈있는 대사가 귀에 박힌다. 특히 영화 도입부에 정조는 형제들에게 닥칠 위기를 예측하고 정약전을 불러 “버티라”고 조언하는데, 코로나19 팬데믹에 휘청대는 지금, 딱 필요한 조언이 아닐 수 없다.

이 감독은 "동양철학을 전공한 김세겸 작가와 함께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3개월간 대본을 썼는데, 계속 리딩을 하면서 (영감을 줄) ‘그분’을 기다렸다"고 말했다. "누가 어떤 대사를 썼는지 기억이 정확치 않은데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다. 동주가 송몽규를 깊이 알면서 자신 역시 더 깊어졌듯, 창대와 정약전도 마찬가지다.
또 서학을 깊이 알수록 성리학이 깊어진다. 누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보다는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인생은 버티는 것 아닌가. 매순간 버티는 것이다.” 12세 이상 관람가. 31일 개봉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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