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2월 25일 20년간 필리핀을 철권통치했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이멜다 대통령 부부는 성난 군중이 진입하자 헬기를 타고 말라카낭 대통령궁을 빠져나가 미국 하와이로 망명했다. 세계는 '3000켤레의 구두'로 대표되는 호화사치의 현장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들 부부가 해외로 빼돌린 재산은 12조원에 달했다.
정적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 암살사건에 격분한 '피플 파워'에 의해 쫓겨난 마르코스는 망명지에서 사망했지만 이멜다는 1992년 금의환향했다. 대통령선거 출마에 이어 1995년 하원의원에 당선된 뒤 3선 연임했다. 딸 이미도 3선 주지사를 지냈고, 아들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는 주지사와 상원의원으로 정치경력을 쌓았다.
시민혁명에 의해 쫓겨난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아들이 36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했다. 10일 차기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된 아들의 뒤에는 권력욕의 화신인 이멜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유명 변호사인 아내 리자의 입김도 예상된다. 무엇보다 러닝메이트를 이뤄 부통령에 당선된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의 딸 사라 두테르테 다바오 시장을 주목해야 한다. 마르코스와 두테르테 두 가문의 연합정부인 탓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멜다의 다큐를 리뷰하면서 인질이 인질범에게 동화되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비유했다. 독재자로부터 피 흘려 얻어낸 민주주의를 잊고, 다시 독재자 가문에 표를 던지는 필리핀의 현실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joo@fnnews.com 노주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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